세련됐지만 아직 미진한 'G2와 개도국 사이'
[ 김봉구 기자 ] 지난 7일 중국 베이징 서우두국제공항에 내렸다. 정오가 가까운 시간이었으나 하늘은 흐렸다. 창 밖 도심 풍경에선 청량한 느낌을 찾기 힘들었다.
숙소로 향하는 셔틀버스에서 기자단은 방진마스크를 2개씩 받아들었다. 2박3일의 출장 기간 동안 사용할 마스크였다. 마스크엔 3M 로고가 찍힌 간이필터가 부착됐다. 악명 높은 베이징의 스모그를 새삼 실감했다. 거리에도 마스크를 쓴 행인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대사관 밀집지역 인근 숙소에 짐을 풀고 곧바로 베이징의 번화가 싼리툰(三里屯)을 찾았다. 싼리툰은 명품 숍과 레스토랑, 바, 클럽 등이 자리 잡아 복합문화공간으로 부상한 곳이다. 중국의 20~30대 젊은 층과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핫 플레이스로 알려져 있다.
◆ '촌스럽다, 싸구려다' 이미지 "이젠 옛말"
싼리툰은 서울의 도심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수십 층짜리 고층 빌딩과 럭셔리 부티크숍, 호텔이 위용을 자랑했다. 싼리툰의 명물인 ‘바(bar) 거리’는 개성 있는 바와 카페들이 오밀조밀 들어섰다. 강한 바람이 부는 추운 날씨였지만 휴대폰 매장엔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대형 쇼핑몰과 제조·직매형 의류(SPA) 브랜드, 플래그십 스토어도 늘어섰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쇼핑백엔 유니클로, H&M, 자라 같은 SPA 브랜드 로고가 선명했다. 아디다스, 나이키 등 대형 스포츠 매장까지 한국에 있는 웬만한 브랜드는 거의 다 볼 수 있었다. ‘아메리칸 어패럴’ 대형 매장에 들른 여기자는 “한국 매장보다 더 좋아 보인다”고 했다.
매장을 둘러봤다. 가격은 싸지 않았다. 웬만한 맨투맨 티셔츠 하나에 200위안(한화 약 3만5600원) 내외의 가격표가 달렸다.
스타벅스 매장의 커피값도 한국과 비슷하거나 비싼 편이었다. 톨사이즈(355ml) 기준 아메리카노 22위안(약 3900원), 카페라떼 27위안(약 4800원), 카페모카 30위안(약 5300원). 국내 스타벅스 가격과 비교하면 아메리카노는 200원 가량 싸지만 카페라떼, 카페모카 등은 오히려 그만큼 비쌌다.
최근 요우커(遊客: 중국인 관광객)의 한국 관광 급증과 무관치 않아 보였다. 여전히 ‘촌스럽다’ ‘싸구려’ ‘짝퉁’ 등의 이미지가 남아있는 중국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더욱이 상하이는 베이징 물가보다 더 비싸다. 서울의 레스토랑에서 20만 원대 후반에 파는 와인이 상하이에선 2~3배 치솟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했다.
중국 물가가 비교적 비싼 것은 “적극 소비층을 공략하기 때문”이란 설명이 뒤따랐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외동 자녀로 이른바 ‘소황제’ 대접을 받고 자란 바링허우(80后) 세대가 소비의 주역이 되는 추세다. 이에 따라 중저가 박리다매를 벗어나 새로운 소비층을 타깃으로 한 고급화 전략을 펼친다는 것.
◆ 관(官)이 갑 … '反자본 아닌 半자본 중국'
숙소인 베이징 세인트레지스(St. Regis) 호텔을 드나들 때마다 매번 검문검색을 거쳐야 했다. 알고 보니 같은 곳에 아일랜드 국빈 방문단이 묵어 생긴 일이었다. 특정 시간대엔 민간 차량의 호텔 출입이 전면 통제됐다.
관(官)에 대한 중국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엄밀히 정의하면 당(黨)에 대한 존중과 충성, 헌신 등이 중요한 잣대가 된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세계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으로 성장한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이 최근 “빌 게이츠와 자선 경쟁을 하겠다”고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공적 기여를 하지 않는 기업이 활동하기 어려운 곳이 중국이다. 실제로 알리바바는 베이징에 대규모 건물 신축도 계획하고 있다.
이번에 취재한 중국 신생기업 트라이벨루가의 ‘테크 컨퍼런스’가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양회(兩會)가 개최되는 인민대회당은 통상 기업체가 행사를 갖기 어려운 곳. 즉 핵심 고위층에 접근 가능한 인맥이 있음을 시사한다.
주오 췬(左春) 시노소프트 최고경영자(CEO)는 컨퍼런스의 패널 토론에서 “많은 유명 외국계 브랜드가 중국에 진출했지만 실패한 이유를 문화적 차이에서 찾을 수 있다” 며 “중국 기업은 해외 기업과 다르다. 국영과 민간기업의 혼합 형태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스타트업과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중국 진출을 돕기로 한 트라이벨루가가 내세우는 핵심 역량도 문화적 차이의 해소다.
그들이 말하는 문화적 차이란 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특수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들렸다. 중국에서 관(官)과의 ‘?시(關係)’는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따라서 해외 기업의 중국 시장 진입 장벽 또는 문턱이 된 정부와의 관계 설정을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굳이 인민대회당에서 행사를 가진 것도 탄탄한 ?시를 입증한 퍼포먼스로 해석됐다.
◆ 지금 중국 민낯은 'G2와 개도국의 혼재'
짧은 일정이었지만 여기저기서 G2로 성장한 중국의 자부심을 확인했다. 행사 주최 측 관계자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영어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곳은 중국뿐”이라고 귀띔했다. 영어 구사력이 떨어지는 일면도 있지만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더 큰 부분을 차지한다.
어떤 성격의 행사든 역사적 장소를 방문하는 게 특색이다.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캘리포니아 정·재계 인사와 한국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한 이번 일정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역사기행을 넘어 ‘이것이 중국의 저력’이라고 강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역사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엿보였다.
후진국의 티를 온전히 벗지 못한 모습도 내비쳤다. 횡단보도에서 차량과 사람이 서로 양보하지 않고 밀고 나갔다. 접촉사고 직전까지 갔다. 차에 타고 있던 기자들이 조마조마한 탄성을 내지를 정도였다. ‘만만디’로 알고 있던 중국인들의 성격과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화려한 겉모습에 가려진 부족한 공중도덕은 아쉬웠다. 일견 점포는 잘 정돈됐으나 상가를 오르내리는 비상계단에는 함부로 걸터앉은 사람들이 통행을 방해했다. 담배를 피우는 점원과 다투는 모습이 발견됐다.
시민의식은 아직 설익은 것처럼 보였다. 신호도 없이 함부로 차선을 바꾸며 끼어드는 차량들은 교통체증을 키웠다. 인력거꾼은 관광객으로 보이는 기자에게 서슴없이 바가지를 씌웠다. 비싼 요금에 내리겠다고 하니 곧장 반값을 부르는 해프닝도 겪었다.
베이징의 밤은 차분했다. 공식 일정을 마치고 오후 10시께 천안문에서 숙소로 돌아오며 바라본 고층 오피스 건물들은 대부분 불이 꺼졌다. 밤늦게까지 고층 빌딩에 불을 밝히고 야근하는 한국의 밤과는 완연히 달랐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1990년대 후반 찾았던 베이징은 도로를 메운 자전거 행렬이 인상적이었다. 그 거리가 이제 교통체증과 스모그로 채워졌다. 세계의 공장 중국에서 세계의 시장으로 탈바꿈한 것마냥 극적 변화다. G2와 개발도상국이 뒤섞인 이중적 모습의 지금 중국은 급성장하면서도 어딘가 세련되지 못한 부분이 남았다. 앞으로 십년, 중국은 또 어떻게 바뀔까.
베이징= 한경닷컴 김봉구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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