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는 역사 반성의 상징
협력·상생의 전향적 태도 보여야"
양기웅 < 한림대 교수·국제정치학 kwyang@hallym.ac.kr >
지난 14일 치러진 일본의 조기총선은 자민·공명 연립여당의 대승으로 끝났다. 자민당은 단독 과반수 238석을 상회하는 291석을 획득했고, 공명당은 35석을 얻어 자민·공명 연립내각은 326석으로 중의원에서 법안의 재가결에 필요한 재적의원 3분의 2(317석)를 넘는 의석을 차지했다. 이제 2016년 여름 참의원 선거에서 이겨 3분의 2석을 차지하면 헌법개정안을 의회가 발의해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이에 반해 제1 야당 민주당은 73석으로 자민당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함으로써 사실상 양당 체제의 종언을 고했다.
향후 아베 신조 총리가 이끄는 일본 정부는 이른바 ‘아베노믹스’의 지속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을 것이다. 외교안보 면에서는 지난 7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한 각의 결정을 반영해 안전보장법제 마련과 1997년 개정된 미·일 방위협력지침의 수정에 본격 착수할 것이다. 그리고 안전보장법제가 정비되면 헌법 개정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총선에서 아베 총리는 중국, 한국, 러시아 등 인근 국가와의 관계개선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한편으로는 “국제사회를 향한 대외발신을 통해 일본의 명예와 국익을 회복시키겠다”는 공약도 제시했다. 위안부 문제로 대립하고 있는 한·일 관계의 전망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국제체제를 형성하는 것은 물리적인 힘과 이익만이 아니다. 공유된 규범과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정당성’과 그 규범과 이념을 결정하는 ‘권위’가 그에 못잖게 중요한 요소다. 탈냉전기의 한·일 관계가 갈등하는 것은 냉전기 한·일 양국이 공유했던 규범과 이념의 바탕이었던 냉전적 정당성의 상실과 공유된 의미를 결정하는 권위로서의 미국의 역할 축소가 원인일 수 있다.
지금 갈등하는 한·일 관계는 힘과 이익을 둘러싼 대립이 아니라 정체성과 정당성을 둘러싼 갈등이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에는 아베 총리가 말하는 ‘아름다운 나라, 일본’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이슈일 수 있고, 한국에는 이 문제가 ‘일본의 반성과 사죄’의 상징이며 한·일 관계를 화해와 미래지향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정당성이다.
이런 정체성 갈등은 안보·경제협력도 어렵게 한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둘러싼 규범과 이념을 공유한다면, 그 다음에는 이해득실을 합리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서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갈등적인 관계 속에서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용인이 한국의 안보불안을 가져오는 이른바 ‘안보 딜레마’가 될 수밖에 없다.
한·일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다. 갈등하고 대립하는 투쟁상태가 될 수도 있고, 협력과 상생의 공동체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힘, 이익과 더불어 정체성과 의미를 결정하는 정당성이다. 물질적 힘과 이익은 의미와 결합하면서 비로소 새로운 국가와 국제체제를 구성한다. 한·일 관계는 협력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지금의 한·일 관계에는 화해와 미래지향적 공유지식, 그 의미를 결정하는 새로운 정당성과 권위가 부재(不在)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위안부 문제는 안보나 경제협력 이슈에 버금가는 중대 사안이다. 위안부 협상의 레벨을 격상시켜야 하는 까닭이다. 위안부 문제는 양국 정체성의 본질을 구성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한·일 양국은 최고 수준의 외교 채널을 가동하고 정상이 직접 나서 상호 인정할 수 있는 정체성을 모색하며 양국 협력에 의미를 부여해줄 정당성을 창출하고 합의해야 한다. 힘들더라도 이 길밖에 없다.
양기웅 < 한림대 교수·국제정치학 kwyang@hallym.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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