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증시 들었다놨다 하는 中 마윈 같은 사람 한국엔 왜 없나
한화 '김승연 컴백 효과'…SK '최태원 공백 쇼크'
강력한 기업가 정신의 위력 제대로 드러낸 단적인 예
[ 이태명 기자 ] ‘불안정한 세계 경제, 촘촘히 짜인 규제, 양산되는 반(反)시장 법안, 강성 노조의 끝없는 요구, 만연한 반기업 정서….’
기업이 왜 성장동력을 잃어 가느냐는 질문에 기업인들이 단골로 내놓는 답이다. 국내외 경영환경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가 빠졌다. 기업가 정신이다. 따지고 보면 기업들의 위기는 언제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위기를 앞장서 돌파한 건 기업인이었다. 불행히도 지금은 그런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중국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이 뉴욕 증시를 들었다 놨다 하지만 국내엔 아직 후보조차 없다. 경영환경을 쉽게 바꿀 수 없다면, 기업인이라도 뛰게 해야 한다. 이른바 ‘김승연 효과’에서 보듯이 그들을 뛰게 해야만 위기를 헤쳐 나갈 돌파구라도 찾을 수 있다.
신진대사 끊긴 기업 생태계
2013년 기준 국내 500대 기업을 2003년과 비교하면 148개가 새로 이름을 올렸다. 얼핏 보면 활발한 세대교체가 이뤄진 듯하다. 뜯어 보면 아니다. 하지만 순수 창업기업은 46개뿐이다. 그중에서 혁신형 기업만 따지면 네이버 멜파스 넥슨 등 달랑 세 곳이다. 1980년대 이후 창업기업 중 시가총액 100대 기업에 새로 진입한 곳도 네이버 다음카카오 코웨이 등 세 곳이 전부다. 기업 생태계에서 신진대사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불임’의 생태계다.
창업 환경이 어려운 탓도 있지만, 세계적 기업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진 젊은이들이 갈수록 적어지는 것도 요인이다. 매년 20만명 이상이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정도로 젊은이들은 모험을 싫어한다. 마윈 알리바바 회장, 마화텅 텐센트 회장, 리옌훙 바이두 회장, 레이쥔 샤오미 회장 등 연부역강(年富力强)한 40~50대 기업가가 즐비한 중국과는 대조적이다.
중소·중견기업은 더 심각하다. 상속세 부담 등을 이유로 가업을 승계하지 않으려는 2, 3세가 많다. 최근 LED(발광다이오드) 조명업체 선일일렉콤, 유아용 의류업체 아가방, 중견 의류업체 약진통상 등이 다른 주인을 찾았다. 정구용 한국상장사협의회 회장은 “임원 연봉 공개, 섀도보팅제 폐지, 기업소득환류세 등 정부와 국회가 온통 기업을 힘들게 할 것들만 만들어 내는데, 누가 사업보국(事業報國)하려 들겠느냐”고 반문했다.
미래 먹거리 못 찾는 대기업
대기업도 쉽게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 경제의 약진을 이끌어 왔던 전자 자동차 조선 등이 멈칫하고 있지만 대체할 산업은 잘 보이지 않는다. 미래 먹거리로 거론되는 우주산업, 사물인터넷(IoT), 전기차, 무인차 등은 이미 해외 기업에 선점당했다. “1990년대엔 반도체, 2000년대엔 휴대폰이란 미래 먹거리가 보였지만 앞으로 10년 뒤엔 뭐가 있을지 막막한 실정”(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이다.
더욱이 일부 재벌 총수는 구속상태다. 오너 중심의 지배구조를 갖추고 있는 한국 기업들에 ‘오너 부재’의 타격은 크다. SK그룹은 작년 초 최태원 회장이 구속된 이후 STX에너지와 경비업체 ADT캡스 인수를 검토했다가 막판에 포기했다. SK에너지를 통해 호주 유나이티드페트롤리엄(UP) 지분을 인수하려던 계획도 접었다. 지난달에는 독일 기업과의 전기차 배터리 합작사업도 없던 일로 했다.
배임·횡령 혐의로 이재현 회장이 구속된 CJ그룹도 올 상반기 투자를 작년 상반기보다 30%가량 줄였다. 이에 대해 김창근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은 “한국 대기업의 특성상 오너가 주요 의사결정을 내리고, 빈칸을 전문경영인들이 메워야 하는데, 한 축(오너)이 비어 있으니 걱정”이라고 말했다.
“기업인을 뛰게 하자”
2010년 초 삼성그룹은 뒤숭숭했다. 직전연도(2009년)에 사상 최대 매출(136조2900억원)을 올렸지만 ‘애플발(發) 스마트폰 쇼크’가 엄습해 오고 있었다. 마땅한 신수종사업도 찾지 못했다. 흔들리던 삼성을 다잡은 건 그해 3월 경영에 복귀한 이건희 회장이었다. 이 회장은 복귀 직후 5대 신수종사업을 제시했고, 이듬해 스마트폰에서 애플을 따라잡았다. 정구현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초빙교수는 “위기 때 위험을 감수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건 창업자와 오너뿐”이라고 설명했다. 한화그룹도 그런 경우다. 한화는 2012년 8월 김승연 회장이 구속된 이후 어려움을 겪었다. 김 회장이 주도했던 이라크 재건 프로젝트 수주는 잠정 중단됐다. 수익성이 악화되던 태양광사업의 구조조정은 손도 못 댔다.
분위기가 달라진 건 지난달 김 회장이 경영을 재개하면서부터다. 지난 2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김 회장은 삼성그룹과의 빅딜, 한화솔라원과 큐셀 합병 등 굵직한 현안을 단번에 풀어냈다. 이달 7일엔 광어회 600인분을 사들고 이라크 공사 현장을 찾아 ‘다시 뛰어보자’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재계에선 ‘김승연 효과’라는 말이 나돌았다.
김창범 한화케미칼 사장은 “이라크 재건사업, 삼성과의 빅딜은 전문경영인이 아닌 오너만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이라며 “회장 복귀 이후 그룹 임직원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고 전했다.
그렇다고 위기 상황을 빌미로 재벌 총수를 풀어 줄 수는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의 형평성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지난 9월 “기업인이라고 가석방 기준이 되는데 안 해주는 건 역차별 아니냐”는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재벌 특혜’, ‘유전무죄’라는 야당의 십자포화가 국민들의 반기업 정서와 맞물려 없던 일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
특별취재팀 하영춘 금융부장, 차병석 IT과학부장, 정종태 정치부 차장, 박수진 산업부 차장, 안재석 IT과학부 차장, 이태명 산업부 기자, 임원기 경제부 기자
[한경+ 구독신청] [기사구매] [모바일앱]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국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