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철의 시사경제 뽀개기] 세계경제의 또다른 태풍 '그렉시트'…그리스의 탈퇴로 유로존 깨질까?

입력 2015-01-09 17:02  

‘그렉시트’와 유럽 재정위기

조기 총선을 앞둔 그리스가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 그리스 의회는 지난달 대통령 선출에 실패하면서 의회가 해산되고 오는 25일 조기 총선을 치른다. 총선에서는 유로존 탈퇴를 공약으로 내건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승리가 예상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시리자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그렉시트(Grexit)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고 5일 보도했다.

-1월6일 한국경제신문

☞ 그리스가 또다시 세계경제에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고 있다. 25일 예정된 국회의원 선거(총선)에서 급진좌파 세력이 승리해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하면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에 버금가는 위기가 올 것이란 우려도 적지 않다. 그리스 사태는 가뜩이나 좋지 않은 세계경제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다. ‘그렉시트(Grexit)’는 그리스(Greece)와 엑시트(Exit·탈출)를 합친 조어로 그리스의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탈퇴를 의미한다.

그리스 총선서 급진좌파가 정권 잡을까?

‘그렉시트’ 가능성을 촉발한 것은 그리스 정치권이다. 그리스는 대통령을 국가 원수로 하는 의회중심제(의원내각제) 국가다. 1986년 헌법 개정 이후 대통령은 권한이 크게 줄어 주로 의전상의 역할을 담당하며, 총리가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대통령은 5년 임기로 의회에서 선출되고 의회해산권을 갖는다. 정부 구성권(내각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 조각권)은 제1당 대표(총리)에게 있다.

그리스는 지난달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대통령은 의회에서 선출한다. 그런데 3차 투표까지 하고서도 신민당과 사회당으로 이뤄진 집권 연립여당(신민주당)이 단독으로 추대한 디마스 후보가 선출 기준인 찬성 180표(의회 정원 300석)에 못 미치는 168표를 얻는 데 그쳤다. 대통령을 뽑는 데 실패하자 그리스 정부는 의회를 해산하고 오는 25일 총선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여론조사 결과 총선에서 제1 야당인 급진좌파연합 시리자가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시리자(SYRIZA)는 극좌성향 정치조직들이 연합한 정당으로 만 40세인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이끌고 있다. 공산주의, 마오쩌둥주의, 트로츠키주의까지 가지각색의 좌파조직 13개가 시리자라는 테두리 안에 있다. 시리자는 집권하면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 등 이른바 ‘트로이카’ 채권단에서 받은 구제금융 조건을 재협상하고 긴축정책을 되돌리겠다고 주장해왔다. 그리스 정부가 외국에서 빌린 빚과 이자의 50% 탕감, 독일이 ‘병든 유럽’을 회생시키기 위해 주도하고 있는 긴축정책 철회, 경제개혁과 공기업 민영화의 철회 등을 내세우고 있다. 긴축과 경제개혁, 공기업 민영화, 사회복지의 축소 등은 국제사회가 그리스에 엄청난 구제금융(2400억유로)을 지원하면서 내걸었던 조건들이다. ‘과도하게 흥청망청대다 위기를 맞았으니 허리띠를 졸라매야 도와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더구나 트로이카로선 이미 2012년에 그리스 채무 50%를 탕감해준 까닭에 시리자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시리자는 지지율이 34~36%로 여당인 신민주당을 3~4%포인트 안팎 앞서고 있다. 그리스 선거법은 제1당에 50석의 의석을 추가로 부여하고, 정부 구성 권한도 우선 주는 까닭에 시리자의 집권 가능성은 예전보다 크게 높아진 상태다.

시리자의 인기가 높아진 건 2009년 가을 본격화된 재정위기 이후 그리스 경제가 피폐해지면서 국민이 먹고 살기가 팍팍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현재 그리스의 실업률은 27%를 넘고, 국민들은 임금 삭감과 복지 수준 퇴보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로 인해 긴축과 개혁을 표방하는 현 집권 연립정당보다는 야당인 시리자의 인기가 높아진 것이다.

부도위기 몰리는 그리스

현재로서는 ‘그렉시트’의 현실화 가능성을 단정하긴 어렵다. 일단 시리자와 여당 간 지지율 격차가 점차 좁혀지고 있다.

지난 2012년 6월의 총선에서도 선거 직전 지지율 조사에서 신민주당 26.5%, 시리자 26.0%로 막상막하였으나 유권자들이 시리자가 집권하면 금융시장이 붕괴될 것으로 우려, 막판에 신민주당에 표를 실어 주면서 시리자가 집권에 실패한 적이 있다.

시리자는 “‘그렉시트’는 현 정권의 정치적 공작일 뿐”이라며 “시리자의 선택지에는 ‘그렉시트’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시리자가 집권하면 그리스 경제는 더 깊은 골로 추락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시리자는 임금 인상, 저소득층 전력·식료품 무상 제공, 공공 서비스 확대 등 복지 지출 확대를 내세우고 있다. 이렇게 되면 나랏빚은 더 늘게 된다. 또 해외에 진 빚을 갚는 걸 거부할 경우 나라살림에 필요한 돈을 모으기 어렵게 된다. 해외자본은 그리스에서 탈출하고 금융시장은 붕괴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스 국채 금리(만기 10년물 기준)는 연 9.5%까지 급등했다. 2011년 유럽 재정위기 당시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시장에선 정부가 발행한 국채의 이자가 연 6~7% 이상이면 사실상 국가부도로 보고 있다. 국채의 부도위험을 나타내는 금융파생상품인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도 7개월 새 559.39bp(1bp=0.01%포인트)나 급등했다. CDS 프리미엄은 채권의 부도위험을 회피(헤지)하기 위해 내는 수수료(일종의 보험료)다. 영국의 경제신문인 파이낸셜타임스는 “그리스의 개혁정책이 중단되면 투자자들의 이탈이 본격화될 것”이라며 “유로존 위기로 확대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 경제엔 ‘설상가상’

그리스 정부는 올 2월까지 쓸 돈을 확보하고 있다. 또 7월에 예정된 빚 일부 상환(35억유로)까지는 대규모 채무 상환이 없어 당장은 여유가 있다. 하지만 IMF에 따르면 올 연간으로는 200억유로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정 불안이 장기화되면 경기 회복세(작년 3분기 성장률 0.7%)가 꺾이고, 극심한 사회혼란이 발생할 가능성 높다. 시리자가 유로존 탈퇴 공약을 철회했으나, 부채 탕감과 긴축 철회를 계속 주장할 경우 트로이카와의 충돌로 탈퇴 카드가 재부각될 수도 있다.

그리스 사태는 세계경제에 ‘폭탄’이다. 유로존의 경제 체력은 재정위기가 본격화된 4년 전보다 좋지 않다. 성장률은 기는 데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달 -0.2%로 떨어졌다. 물가가 마이너스로 떨어진 건 5년 만이다.

그리스의 경제불안은 주변국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 가장 먼저 전염될 나라는 이탈리아다. 이탈리아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130%로 2010년 그리스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리스가 탈퇴할 경우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도 도미노로 탈퇴할 가능성이 높다. 1999년 출범한 유로존의 미래가 ‘풍전등화’인 셈이다. 지난 5일 유럽 주요 증시가 급락하고, 유로화 가치는 유로당 1.18달러로 9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진 건 이 때문이다. 유로존이 흔들릴 경우 ‘유럽합중국’이라는 정치 실험도 좌초할 수 있다. 그리스를 EU에 남겨두는 게 계속 골칫거리를 만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럽 정치인들이 그리스의 EU 잔류를 지지하는 이유다.

배리 아이컨그린 UC버클리대 교수는 지난 3일 미국경제학회에서 “그렉시트가 다른 나라로 번지면서 단기적인 충격이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의 제곱(square)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 컬럼비아대 교수도 “유럽이 일본처럼 장기 침체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며 “유럽의 침체는 미국과 중국의 성장세를 둔화시켜 세계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독일은 그렉시트에 대비해 비상계획을 마련 중이다. 하지만 독일 경제 자체도 휘청거리고 있어 해법을 찾기란 만만치 않다.

시리자의 주장대로 그리스 채무를 다시 탕감하고 복지지출을 늘리도록 허용해줄 경우 다른 국가에도 똑같이 해줘야 한다는 점이 유럽 지도자들의 딜레마다. ‘도덕적 해이’가 번질 수 있는 것이다. 유럽은 지난 재정위기때 유럽안정메커니즘(ESM)이라는 구제금융기구를 설립해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엔 더 큰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

강현철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hc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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