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가고 싶다

입력 2015-02-09 07:01  

보길도 - 동백이 만들어낸 붉은 물결
청산도 - 한국 최고 트레일 슬로길을 걷다
하의도 - 농민의 땀과 눈물이 깃든 섬
여서도 - 거대 돌담이 둘러싼 '한국의 이스터섬'
사도 - 공룡 발자국 따라 수억년 전 시간여행




입춘을 지나니 벌써 봄이 도착한 것 같다. 아직 계절은 스산해도 남도에는 이른 봄의 전령들이 도착해 마음까지 훈훈해진다. 그중에서도 요즘 남도의 풍경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동백이 만들어낸 붉은 물결’이다. 봄날 피고 지는 선운사의 동백은 진짜 동백(冬柏)이 아니다. 춘백(春柏)이다. 동백은 이름과 달리 늦가을부터 늦봄까지 물경 반년 동안이나 피었다 지기를 거듭한다. 그래서 가을에 피면 추백(秋柏), 봄에 피면 춘백(春柏), 겨울에 피어야 비로소 동백(冬柏)이다.

동백과 춘추백은 낯빛부터 다르다. 추백이나 춘백에서는 뜨거운 정열이 엿보이는 반면 동백에서는 서늘한 결기가 느껴진다. 겨울에 피는 동백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래서 꿀을 만들지 않으니 당연히 벌, 나비나 동박새도 날아들지 않는다. 누구를 유혹할 생각도 없이 오로지 온 에너지를 꽃 피우는 데만 집중한다. 꽃에 결기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대책 없이 타오르다 붉게 지는 목숨, 저 선??동백으로 인해 겨울은 비로소 겨울답다.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이고 따뜻한 휴식을 꿈꾼다면 전남의 섬만한 곳이 없다. 붉은 동백이 진한 향기를 뿜는 보길도부터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청산도, 이채로운 돌들이 모여 있는 여서도, 공룡이 놀던 사도까지 뱃길 닿는 곳마다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보길도 - 윤선도의 정원이자 동백의 화원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의 정원으로 널리 알려진 섬이지만 동백의 화원이기도 하다. 남도의 동백 섬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그러므로 보길도의 진가를 알려면 겨울에 가야 한다. 보길도의 동백을 보지 않고는 보길도를 봤다고 할 수 없고 동백을 봤다고도 할 수 없다.

보길도에서 동백이 가장 아름다운 곳은 고산의 정원인 세연정과 부용리 마을회관 앞의 동백숲, 동천석실 오르는 길의 동백터널, 보옥리 해변의 동백나무 노거수림이다. 동백기름처럼 동백꽃 또한 실용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옛날 보길도 인근 섬들에서는 섣달 그믐 저녁이면 동백꽃 우린 물로 목욕하는 풍습이 있었다. 동백꽃 물로 씻으면 종기도 치료되고 피부병을 방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괜히 남도가 아니다. 겨울에도 따뜻해서 남도요 남국이다. 서울이 영하 10도로 내려가 꽁꽁 얼어붙을 때도 남도의 섬들은 영상의 날씨다. 그래서 보길도의 겨울 들판에는 노지 배추며 무, 시금치는 물론 그 연하다는 상추마저도 파릇파릇하다.

“영주(제주도) 가느니 보길도라는 민요가 있다.” 1928년 8월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최용환(崔容煥)의 보길도 여행기 ‘윤고산의 화원을 차자(찾아)’에 나오는 이야기다. 최용환은 고산이 살았던 보길도의 부용동 골짜기를 둘러보고 무릉도원이라 표현했다. 물론 최용환보다 200년 앞서 보길도를 여행한 윤위(1725~1756)도 ‘보길도지’에서 “예부터 동방의 명승지로는 금강산 삼일포와 보길도가 있다고 하는데 그윽한 아취로는 삼일포가 보길도만 못하다”며 보길도 예찬에 입이 말랐다. 보길도의 명성은 고금이 다르지 않다.

하지만 보길도의 명성을 좇아 고산의 유적이나 예송리 해변을 가본 사람도 보길도의 절정을 본 것은 아니다. 보길도의 최고 비경은 오래 동안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비경이 도치미다. 남도에서는 도끼를 도치라 한다. 도치미란 도끼날 끝처럼 가파른 절벽을 뜻한다. 왕복 4㎞의 도치미 능선에서는 다도해의 섬과 바다가 환상처럼 펼쳐진다. 마침내 도치미 끝에 다다르면 거기 숨이 딱 멈출 것 같은 풍경이 나타난다. 위태로운 절벽인데 그토록 평화로울 수가 없다. 절벽 같은 삶에서도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해 주는 꿈결 같은 풍경이다.

청산도 - 천년의 신전이 남아 있는 사색의 섬

봄날 유채꽃 피고 청보리 일렁이는 청산도를 찾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래서 봄이면 한국의 대표적인 슬로시티 청산도가 밀려드는 인파로 북새통이다. 하지만 겨울 청산도를 찾는 사람은 드물다. 겨울 청산도에서는 봄동을 수확하는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파도는 동백나무 숲 아래까지 밀려와 일렁인다.

오래 길을 걷다보면 등줄기에 땀이 흐를 만큼 청산도의 겨울은 따뜻하다. 겨울에는 한국 섬 최고의 트레일인 청산도 슬로길을 온통 독차지하고 걸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한 복이 없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걷기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간. 청산도는 온전히 나만의 섬이 된다. 나는 오직 내면의 나와 동행하면서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다. 내가 듣지 못했던 내 안의 이야기가 들을 수 있다. 이 보다 더 큰 여행의 선물이 또 있겠는가.

청산도에 가면 놓치지 말고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서편제길 옆의 당리 당집이다. 당집은 한내구(韓乃九) 장군을 신으로 모셨던 신전이다. 한 장군은 신라시대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부하였다. 장군은 청산도를 지켰고 주민들의 신망이 높았다. 장군이 죽자 섬 주민들은 돌무덤을 만들어 주고 그 옆에 당집을 지어 수호신으로 모셨다. 그 신앙이 천년을 이어왔다. 천년의 신전이 남도 섬 청산도에 있다. 놀라운 일이다.

하의도 - 공주와 대통령의 섬

하의도는 공주와 대통령의 섬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신안군 하의도 후광리에서 태어났다. 하의도는 한국 농민운동사의 기념비적인 섬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직후 내륙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고 갯벌을 간척해 만든 하의도의 농토를 인조는 자신의 고모인 정명공주(1603~1685)에게 ‘하사’해 버렸다. 단 정명공주의 4대손까지만 세미(稅米)를 받도록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정명공주의 4대손이 사망한 후에도 공주의 후손인 ゾ?가문은 하의도 주민들에게 농토를 돌려주지 않았다. 하의도 농민들은 빼앗긴 농토를 되찾기 위해 330년 동안이나 싸워서 마침내 땅을 되찾았다.

하의도를 찾는 사람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와 함께 꼭 찾아가는 곳이 큰바위 얼굴이다. 하의도에 딸린 무인도인 죽도의 형상이 마치 사람 얼굴처럼 보인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여서도 - 한국의 이스터 섬

이 나라에서 돌담이 가장 아름다운 섬은 완도의 여서도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고 거대한 돌담들이 마을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여서도는 그야말로 돌과 바람의 땅, 한국의 이스터 섬이다. 마을의 집들은 가파른 비탈에 서 있고 그 반은 돌집이다. 작은 마을이지만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있어 초행의 나그네는 길을 잃고 헤맬 정도다. 이 나라 어느 곳에서도 여서도처럼 장대한 돌담들을 다시 만나기는 어렵다. 바람 때문에 작물이 제대로 자랄 수 없으니 집뿐만 아니라 밭까지도 돌담을 쌓았다.

마을의 돌담은 전체가 하나로 이어진 거대한 성곽 같다. 여서도는 완도와 제주 사이 큰 바다에 홀로 서있는 작은 섬이다. 그 바람이 오죽했을까. 그래서 여서도의 돌담은 바람과 사람의 합작품이다. 여서도는 겨울에 가야 제격이다. 이때라야 돌담을 뒤덮은 넝쿨들이 사라지고 돌담들이 온전한 제 본색을 다 드러내는 까닭이다. 여서도의 주산 여호산 등산로 곳곳에 똬리를 틀고 해바라기를 즐기던 뱀들도 모두 겨울잠을 자러 들어가 여서도의 숲길이 안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도 - 공룡이 놀던 사도

여수의 섬, 사도에서는 한 해에도 몇 번씩 ‘모세의 기적’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특히 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2월 영등사리 때는 평상시 배를 타야만 오갈 수 있는 사도 인근의 모든 섬들을 걸어서 건널 수 있다. 이때 사도를 찾는 사람들은 사도와 추도, 중도, 장사도, 나끝, 연목, 시루섬까지 7개의 섬들이 ㄷ자 모양으로 이어지는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진귀한 기회다.

사도를 비롯한 이들 섬들은 공룡 섬이기도 하다. 섬이 공룡발자국 투성이다. 7개의 섬에서 3800여개의 공룡 발자국이 발견됐고 이 중에는 공룡이 84m를 걸어간 흔적까지 남아있다. 그러므로 사도로 가는 길은 수억년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간 공룡들의 시대를 찾아가는 시간여행이다.

여행 정보

보길도는 해남 땅끝과 완도 화흥포항 두 곳에서, 청산도와 여서도는 완도항, 사도는 여수 백야항과 여수항, 하의도는 목포항에서 배가 출항한다. 출발 전에 들고나는 배 시간 확인과 주민등록증 지참은 필수다. 섬 여행의 관건은 날씨다. 기상예보를 잘 듣고 떠나야 낭패가 없다. 다른 섬들은 날씨에 크게 구애받지 않지만 여서도는 먼 바다 섬이라 겨울이면 결항하는 날이 잦다. 그래서 여서도는 시간의 속박에서 자유로운 영혼들에게 맞춤하다. 비수기라 숙박업소가 모자랄 일은 없으니 현지에 가서 정해도 늦지 않다. 어느 섬도 잠을 못자거나 밥을 거를 일은 없다. 음식에 실패할 확률도 없다. 남도가 아닌가. 근심 없이 떠나시라.

강제윤 시인(‘섬택리지’ 저자, 인문학습원 섬학교 교장) gilgu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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