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은 급(級)과 다르다. 격의 애당초 뜻은 나무의 굵고 긴 가지다. 나무의 중심인 모양에 인품을 더한 자형이라 등급과 서열을 뜻하는 급과는 차이가 있다. 격을 보면 급이 보이나 급을 본다고 격이 보이진 않는다. 격은 벌어지는 장소의 청탁(淸濁)과 강유(剛柔)에 의해 그 모습을 내보이다, 온전한 상대를 만나면 그때서야 향취를 내뿜는다. 아차산과 한강의 만남은 이처럼 그림자와 소리의 울림과 같은 감화(感化)다.
성종 3년 “아차산(峨嵯山)은 국도(國都)를 비보(裨補)하는 땅이고 강무장(講武場)이 되니 청컨대 경작(耕作)을 금하고 벌채(伐採)를 금하소서”라는 내용을 담은 병조의 상소가 올라온다.
비보는 돕는다는 뜻이다. 그럼 무엇으로부터 국도를 지켜 돕겠다는 것인가. 이 해답은 세조 10년 최연원의 상언에서 알 수 있다. ‘아차산(峨嵯山)이 관문(關門)을 진색(鎭塞)하니…’ 여기서 관문은 한양 도성, 진색은 막는다는 의미다. 온 몸 던져 막아내는 크디 큰 물 한수(韓水), 한강이 그것이다.
물의 흐름은 류(流)와 회(回) 두 가지다. 류(流)는 물이 일직선으로 갑자기 쏟아져 들어와 깨고 부수는 충파(沖破)다. 이 물길을 받으면 노왕멸후(虜王滅侯)라 하여 왕은 포로로 잡히고 제후는 멸망한다. 결국 아차산은 한강의 류(流)함을 막아 조선의 도읍을 지킨 최전선 방어벽인 셈이다. 이 의미는 한강의 격은 국도(國都)와 맞상대라는 말이다. 한 개인의 사사로운 양택(陽宅)을 어찌 한강의 격과 맞춰 논한단 말인가. 국도의 왕을 폐왕시키는 물길이니 한 개인이야 물보듯 뻔한 일 아니겠는가.
풍수학에서 물은 재물이라 소문 나 있다. 회(回)하여 굽이 돌아 흐르는 듯 멈춘 듯하고, 상대와의 주고 받는 격이 맞아 유정(有情)함을 잃지 않는 경우 음양(陰陽)이 맞아 그제서야 복되다 한다. 아차산의 유정함은 국도를 향한다. 다시 일러 아차산이 품고 안는 것은 강북 속살이다. 다른 면은 등(背)이니 풍광만 좋을 뿐 풍치는 없다. 한강변에 치솟은 빌딩숲의 마음은 급의 풍광일까 격의 풍치일까. 산천은 그대로인데 욕망의 조롱박들이 조롱조롱 매달린 아차산은 누굴 기다리는 걸까.
강해연 < KNL 디자인그룹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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