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공방' 감정 이젠 TV로?…화해의 '골든 타임' 놓칠라
[ 김민성 기자 ] "LG전자 슈퍼UHD TV, 우리에게 오히려 도움이 되겠네요.(웃음)"
언중유골(言中有骨). 삼성전자의 TV 사업을 이끌고 있는 김현석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사장)의 뼈있는 농담이다.
김 사장은 25일 수요 사장단 회의를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LG전자의 2015년 TV 신제품을 어떻게 보냐'는 질문에 "(SUHD와) 이름이 비슷해 우리 사업에 도움이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전날 LG전자는 2015년형 TV 핵심 신제품으로 '울트라 올레드(OLED) TV'와 함께 '슈퍼(Super) HD(UHD) TV'를 국내에 첫 공개했다. 슈퍼UHD TV는 퀀텀닷(양자점) 기술로 불리는 나노 소재 패널을 액정표시장치(LCD)에 덧대 화질을 한 단계 향상시킨 제품이다. LG전자가 "화질 혁신을 이룬 새로운 UHD TV 시리즈"라고 강조했을 만큼 올해 TV 라인업의 큰 축이다.
삼성전자가 먼저 출시한 슈퍼 초고화질(SUHD) TV와 유사한 경쟁 제품이기도 하다. SUHD 역시 퀀텀닷에 기반한 나노 기술력을 접목해 화질을 배가한 초고화질 TV다. UHD TV에 퀀텀닷 패널을 덧대고, 업스케일링 엔진을 탑재해 동일 화소수로도 보다 나은 화질을 제공한다.
명칭 S 역시 삼성(Samsung)을 대표하는 '슈퍼(Super) TV'를 표방한다. 삼성전자는 여기에 압도적인(Spectacular), 스마트(Smart), 세련된(Stylish), 최고의(Superb) 등 화려한 여러 수식어로 홍보 중이다.
퀀텀닷 제품을 일제히 출시한 국내 대표 가전회사 삼성전자와 LG전자가 'S' 명칭을 두고 신경전을 펼치고 있는 꼴이다. 최고경영자인 김 사장의 이날 발언 역시 경쟁사에 대한 평가를 자제하는 전자업계의 통상적 관례에 비춰볼 때 미묘한 긴장감을 낳는다.
가전 대표제품인 TV의 화질 기술력에 대한 양사의 기싸움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삼성전자는 9년 연속 세계 평판 TV 점유율 1위를 내세워 '많은 소비자가 선택하는 삼성전자 제품이 진정한 승자'라고 강조하고 있다.
점유율이나 매출 면에서 뒤지는 LG전자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기술을 앞세워 '화질은 LG'라고 반격해왔다. TV 완제품 판매에서는 밀리지만 LG디스플레이의 기술력 및 점유율을 기반으로 삼성을 앞지르겠다는 '패널 자신감'이 대단하다.
최근에는 상대방 전략 TV 제품을 두고 설전을 주고받고 있다. 삼성전자의 김 사장은 올레드TV 시장에 대해 "우리는 소비자가 살 수 있고 원하는 제품을 만든다"며 "시장 볼륨(수량)이 뒷받침되지 않은 프리미엄 제품은 의미가 없다"고 가치절하했다.
올레드 TV는 LG그룹이 핵심 기술 역량을 대표하는 제품이다. 그러나 비싼 가격과 디스플레이 제조 수율이 낮다는 단점 때문에 아직 판매량이 적다. 지난해 전세계적으로 팔린 올레드TV는 채 100만대가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해 전세계 TV 판매량이 2억대가 넘은 것과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장점도 많다. 패널이 스스로 빛을 내기 때문에 백라이트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아 검은 색(Black)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여기에 상하좌우 넓은 시야각(Angle), 자연색에 가장 가까운 컬러(Color), 얇고 세련된 디자인(Design) 등 이른바 'ABCD'가 강점.
특히 두께가 얇고 구부리기 쉽다. 향후 웨어러블(입는) 제품 및 커브드(곡면) 디스플레이 제품을 만드는데 용이해 미래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LG전자는 이 부분에서 삼성전자의 LCD 커브드 TV 기술력을 깎아내리고 있다. 24일 LG전자의 TV 신제품을 소개한 한 프리젠테이터는 "누군가는 화질이 떨어지는 걸 알면서도 화면을 굽히기도 한다"고 강조했다.
LCD를 굽힌 곡면 TV는 시야각 왜곡이 발생할 수 밖에 없어 화질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굳이 삼성전자라고 지목하지 않았지만 삼성전자가 지난해부터 핵심 제품군에 탑재한 LCD 커브드 기술을 겨냥한 발언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진정 모든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건 LG 올레드 밖에 없다"는 자신감 넘치는 발언도 잊지않아 더 그랬다.
양사는 이미 지난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쇼 CES2015에서 '슈퍼 TV' 신제품을 나란히 공개한 바 있다.
삼성전자는 SUHD TV 알리기에 치중했다. 반면 LG전자는 '슈퍼 TV'가 아닌 올레드 기술력 과시에 더 집중했다. 퀀텀닷 TV의 정체성 논란이 뜨거웠던 탓이다. 퀀텀닷은 진정한 디스플레이 진화 모델이 아닌 개선 기술인 탓에 과도기적 트렌드 상품에 그칠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삼성전자도 SUHD TV가 평범한 퀀텀닷 TV에 불과하다는 시각에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 퀀텀닷 패널 제조업체가 양산한 동일한 패널을 LCD 백라이트 앞에 일괄 적용했던 기존 퀀텀닷 TV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삼성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나노 소재 패널 및 업스케일링 기술, 전용 UHD 콘텐츠, 타이젠 사용환경 등 삼성의 역량이 망라된 '새 카테고리 제품'이라는게 공식 입장이다.
반면 LG전자는 '슈퍼 TV'가 퀀텀닷TV라고 명백히 인정하고 있다. 이 TV를 알리는데 주력하지도 않는다. CES 2015 현장에서도 슈퍼UHD TV를 '초고해상도 컬러 프라임'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공개했지만 기술을 알리는데 큰 힘을 할애하지 않았다. 향후 3년 내 더욱 대중화할 것으로 기대되는 올레드TV 기술력 강조에 공을 쏟았다.
'슈퍼 TV' 온도차가 분명하다 보니 판매량에 대한 기대치도 양사가 판이하게 다르다. 삼성전자의 김 사장은 SUHD TV를 올해 600만대를 팔겠다고 공언했다. 신제품인 SUHD TV가 올해 TV 판매량의 10%를 책임진다는 뜻이다. 고가 TV라 매출로 환산하면 25~30%에 육박한다.
LG전자의 TV 사업을 이끌고 있는 권봉석 홈엔터테인먼 ?HE) 사업본부장(부사장)은 큰 기대가 없는 눈치다. 권 부사장은 "퀀텀닷 TV는 올해 처음 출시되는 기술이라 발전 가능성을 확정하기는 어렵다"며 "시장에서 파급효과를 볼지는 지켜봐야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을 아꼈다. 대신 올레드TV 판매량을 지난해 대비 10배 이상 늘리겠다고 자신했다. LG에게 올레드는 목숨과도 바꾸기 힘든 자존심이다.
그래서 소비자는 혼란스럽다. 사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헷갈린다.
독한 말의 수위가 점점 올라가는 양사 TV 신경전을 보면서 '세탁기 고의 파손' 문제가 떠오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검찰 기소로 결국 법정에 나란히 서게 됐다. 업계에서는 세탁기 문제로 깊어진 양측 다툼이 TV로 번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단순히 "LG가 삼성 TV의 S를 따라한 게 아니냐"는 의혹 제기부터 "삼성 SUHD는 수드(Sued·소송 제기)"라는 비아냥까지 들린다.
독한 말이 하나 둘 수위를 넘다보면 그 독함은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지고 결국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상한 감정을 이성과 논리로 포장해 싸움을 벌이다보면 결국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막는 지경에 이른다.
세탁기 싸움도 결국 '세치 혀'의 전쟁이었다. 입장 싸움과 검찰 압수수색 싸움, CCTV 싸움, 법정 싸움. 치고 받은 난타전 속에 독한 말들이 넘쳐나면서 정작 진정성을 담은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은 한마디 오가지 못했다. 결국 세탁기 파손 공방은 진실 여부와는 관계 없는 진흙탕 여론전으로 전락해버렸다. 기자가 만나본 양사 내부 관계자도 한결같이 "진정성 담긴 사과 말 한마디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텐데, 이런 상황까지 바란 건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법정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려내는 곳이다. 그러나 법정 싸움이 길어지면 누구나 누더기가 된다. 유·무죄가 가려져도 결국 모두가 피해자이고, 모두가 가해자가 되고마는 제로(0)섬 게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여론은 여전히 싸늘할 것이다. 꼭 승리해야하는 전쟁의 야만성을 우리는 익히 배워 알고 있는 탓이다.
예민한 시기다. 세월호에만 '골든 타임'이 있는 게 아니다. 양사 역시 화해의 '골든 타임'을 오늘도 지나치고 있다. 말 한마디면 천냥 빚도 갚는다고 했다. 허름한 대포집에서 '소주 한잔' 나누시길 권한다.
한경닷컴 김민성 기자 mean@hankyung.com @mean_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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