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째 내려온 좋은 원단에 대한 고집…'명품업계의 다윗'을 만들다

입력 2015-02-27 07:00  

Best Practice - 에르메네질도 제냐

1892년 이탈리아 산간서 시작
연매출 1조8000억원대 성장

원단 품질에 최우선 투자 집중
시장상황 나빠져도 원단서 수익

신제품 기획~판매 4주면 충분
속도경영으로 아시아 시장 공략



[ 강동균 기자 ] 이탈리아 고급 남성 패션 브랜드 에르메네질도 제냐(이하 제냐)는 세계 명품업계의 다윗으로 불린다. 지난해 매출은 12억7000만유로(약 1조8000억원) 정도로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리치몬트(Richemont) 같은 거대 패션 기업 매출의 5~10%밖에 안 되지만 3대째 가족 경영을 이어가며 105년을 살아남았다. 덩치는 작지만 명품 시장에서 제냐는 자신만의 색깔을 유지하며 꾸준한 사랑받고 있다. 세계 최고급 남성복 시장의 30%를 차지하고 있으며 양복 한 벌 가격이 200만~300만원대에 이른다. 세계에 546개 매장을 두고 있고 매출의 80% 이상이 수출에서 나온다.

◆산골서 시작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

에르메네질도 제냐는 1892년 이탈리아 북부 산간지방인 트리베로에서 태어났다. 20세에 아버지 미켈란젤로 제냐로부터 물려받은 조그만 원단 공장을 발판으로 자탔?이름을 딴 ‘에르메네질도 제냐’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그는 아버지 공장을 물려받은 뒤 프랑스식 낡은 직조기를 새로운 영국식 기계로 바꾸고, 최상의 원자재를 직수입했다. 최고의 품질을 가진 제품을 생산하겠다는 신념으로 1930년부터 자신의 이름인 제냐를 원단의 가장자리에 새겨 판매했다.

제냐는 원단 생산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제냐의 이름이 이탈리아와 해외에서 최고 품질로 알려지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남성복 시장에 진출했다. 1966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두 아들 안젤로와 알도가 공동 경영을 시작했다. 지금은 안젤로의 아들 질도가 최고경영자(CEO)를, 알도의 아들 파올로가 회장을 맡으며 역시 공동 경영을 하고 있다. 안젤로의 첫째 딸인 안나는 이미지를 담당하며 회사의 ‘얼굴’ 역할을 한다. 안젤로의 둘째 딸 베네데타는 인사를 맡고 있다. 사촌 관계인 4명이 회사의 핵심 부문을 맡아 공동으로 이끌고 있는 셈이다.

제냐 가문이 3대째 성공적인 가족 경영을 해오며 이탈리아 산간에서 시작한 가업을 연 매출 1조8000억원에 달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족 간 유대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장기적인 안목의 투자와 품질 우선 경영에 공감하고 있다. 제냐는 최고급 천연 원료만 사용하지만 양모나 캐시미어 등 천연 원료를 직접 만들지는 않는다. 그 대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원산지 주민들을 독려해 최고 품질의 천연 섬유를 생산하도록 유도한다. 국내 유수의 남성복 브랜드에서 ‘제냐 원단을 사용했다’는 말이 품질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남이 디자인 주력할 때 원단 품질 집중

다른 명품 업체들이 디자인에 주력하는 동안 제냐는 원단에 집중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재단사들 사이에서 제냐 원단의 명성은 자자했다. 원단의 품질이 매우 뛰어나 고객이 입던 양복 원단의 안과 밖을 뒤집어 양복을 다시 만들 수도 있었다. 이후 제냐는 굵기가 사람 머리카락 5분의 1밖에 안 되는 원사를 만드는가 하면 다림질을 하지 않아도 주름이 잡히지 않는 양모, 방수와 방풍 기능이 들어간 양모를 만들어냈다. 또 넥타이나 스카프에만 쓰이던 실크의 내구성을 높여 재킷이나 코트에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제냐는 원단을 경쟁 업체들에도 공급한다. 에르메스, 아르마니, 베르사체, 구찌, 페라가모, 그리고 한국의 제일모직과 고급 양복점들이 제냐의 원단을 사용하고 있다. 자동차 회사들도 최고급 차량의 시트에 제냐 원단을 쓴다. 제냐는 제작하는 원단 중 절반으로는 정장을 만들고, 나머지는 다른 브랜드에 공급한다. 이렇게 하면 전체 시장 상황이 나빠져도 안정적인 수준의 수익을 올릴 수 있고, 최종 소비자에게 여러 채널로 ‘제냐’라는 브랜드를 알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제조부터 유통까지 직접 관리

제냐는 원자재 구입부터 완제품 생산, 그리고 판매까지 전 과정을 직접 관장하는 소위 ‘수직통합체계’를 구축한 세계 유일의 기업으로 꼽힌다. 호주 양 목장을 직접 지원하고 방직공장을 세워 원단을 자체 생산한다. 매장에?소비자 반응이 좋지 않으면 제작과 원단 소싱에 곧바로 반영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제냐는 세계 546개 매장을 모두 직영한다. 소비자와의 연결고리를 유지하는 것이 성공의 핵심 요소라는 판단에서다. 1991년 명품 업체 중 처음으로 중국에 진출한 뒤에도 물류, 배송, 매장 서비스 모두를 직접 통제한다. 다른 브랜드들이 해외에 진출하면서 현지 백화점이나 면세점 등 유통 채널에 매장 운영을 맡긴 것과는 다른 전략이다. 그런 점에서 제냐의 비즈니스 모델은 ‘패스트 패션’으로 불리는 SPA(제조·직매형 의류 브랜드)와 비슷하다. 신제품을 기획해 매장에 전시하기까지 4주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명품 업계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속도다.

제냐는 한 해 매출의 절반 정도를 아시아 시장에서 거둔다. 1990년대 제냐를 비롯해 베르사체, 돌체앤가바나 등 많은 명품 브랜드가 잇따라 아시아 시장에 진출했지만 제냐만큼 성공을 거둔 브랜드는 없다. 당시 상당수 명품 브랜드는 아시아 현지 백화점이나 토털 패션 브랜드에 매장을 맡겨 운영했는데, 이들이 서비스보다는 눈앞의 매출에 집중한 탓에 브랜드 이미지가 훼손된 것이다.

제냐는 확장하는 속도는 조금 늦더라도 확실한 고객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주력했다. 매장에 제품을 전시하는 순서나 방법, 상황에 따라 고객을 대하는 자세 등을 세세하게 명시한 지침을 공급하고, 직원들에게 제냐의 역사와 브랜드 정체성을 철저히 교육했다. 질도 제냐 CEO는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제작부터 판매, 사후 고객 관리까지 핵심은 ‘고객과 가까이’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에르메네질도 제냐 연혁

-1910년 재래식 직조기 이용해 울 원단 생산
-1933년 염색 및 마무리 공정라인 설치
-1938~1945년 미국 등 40여개국 원단 납품
-1960년 남성 맞춤복 시장 진출
-1968년 의류공장 설립 재킷소매·바지 생산
-1970년 액세서리 및 스포츠 웨어 출시
-1980년 파리에 첫 번째 부티크 오픈
-1985년 밀라노에 부티크 오픈
-2001년 원단업체 ‘마스터룸’ 지분 인수
-2002년 가죽 전문업체 ‘롱기’ 인수
-2003년 향수 컬렉션 ‘에센제’ 출시
-2004년 세컨드 라인 ‘지-제냐’ 출시
-2004년 ‘에르메네질도 제냐 아이웨어’ 런칭
-2006년 언더웨어, 양말 출시
-2006년 ‘톰 포드’ 켈렉션 런칭
-2013년 세계적 디자이너 ‘스테파노 필라티’ 영입

강동균 기자 kd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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