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프런티어 시대, 전문대에 길을 묻다] (13)성백형 백자종합건설 대표

입력 2015-03-08 15:30   수정 2015-08-30 22:42

(대림대 토목환경과 졸)
유명 4년제 출신 제치고 승진·수상…"전문대 교육이면 충분"



천안역 인근에 위치한 백자종합건설 빌딩. 중소 규모 건설회사로는 드물게 자체 사옥을 보유했다. 그곳에서 만난 성백형 대표(사진)는 ‘꿈’을 얘기했다.

“매번 남의 건물만 지어주면서 부러웠어요. ‘내가 만들어준 건물에서 저 사람은 자기 꿈을 펼치는구나’ 하고. 언젠가부터 내 건물도 하나 갖고 싶다는 로망이 생겼죠. 마침 기회가 생겨 이곳에 건물을 지은 겁니다. 나름의 꿈을 이룬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죠.”

스스로의 말처럼 그는 늘 꿈을 꿨다. 여건이 어렵다고 해서 불평하지 않았다. 대신 주어진 현실에서 늘 악바리로 살았다. 성실히 일했고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꿈을 이룬 중소기업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특별한 연고 없이 세워진 빌딩과 성 대표의 삶은 닮은꼴이다.

그의 인생은 보통 사람들보다 몇 단계를 더 거쳐 완성됐다. 공고와 전문대를 나와 유수의 기업에 입사했다. 단계마다 1등을 차지했다. 주경야독하며 4년제대에 편입해 대학원 공부까지 마쳤다. 창업해 매출 100억원을 넘나드는 회사로 키우고 대학 교수로 후배들도 가르쳤다.

성 대표는 “늘 열심히 살았다. 그런 노력이 인생의 고비마다 새로운 문을 여는 계기가 돼줬다”면서 “그 시작이 전문대(대림공전)였다. 전문대 출신이란 패배의식 대신 자부심을 갖고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어디든 통하지 않을 곳이 없다”고 힘줘 말했다.

- 전문대를 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4남2녀 가운데 위로 형님 두 분이 모두 대학을 다녔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데 나까지 대학 가긴 어렵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공고 진학을 결심했다. 어릴 때부터 조숙한 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좋은 학교는 아니었지만 고교를 1등으로 졸업했다. 대학 진학 기회가 있었지만 형편상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택했다. 측량회사였는데 2년 근무하니 안 되겠다 싶더라.”

- 어떤 점을 느꼈는지.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고 느꼈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고졸 경력만으로는 좀 달리는 일이었다. 항공삼각측량과에 근무했는데 당시엔 흔치 않은 컴퓨터를 다뤄야 했다. 서울대 출신인 상사의 영향도 있었다. 대학 가서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 프로필 보면 회사가 해외유학 제의까지 할 만큼 인정받았는데.

“3개월간 교육평가에서 입사 동기 50명 가운데 1등 했다. 2년 근무한 뒤 항공측량 분야 선진국인 네덜란드 유학 제의도 받았다. 좋은 조건이었지만 다녀오면 5년 동안 의무적으로 근무해야 했다. 분야가 항공측량으로 한정되는 것도 아쉬웠다. 그래서 대학 진학을 결정했다.

대림공전이 처음 셀痴?때였다. 공전은 학력고사를 따로 치르지 않아도 고교 성적과 기능사 자격증만 있으면 갈 수 있었다. 회사 근무하다 갑자기 대학 진학을 결정한 상황이라 입시 공부를 할 여유가 없었다. 고교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으니 자격증 따서 대림공전에 입학했다.”

- 당시엔 공고나 전문대도 상당히 인정받지 않았나.

“청량공고가 나름대로 공고 중에선 5대 공립에 들 정도로 손에 꼽혔다. 대림공전도 대림산업이 세운 학교니까 괜찮았고. 어디든 가면 최선을 다한다는 게 내 인생관이다. 그렇게까지 좋은 학교들은 아니었지만 고교, 대학 모두 수석 졸업했다. (웃음)”

- 우수학생으로 뽑혀 모기업인 대림산업에 입사했다고.

“대림공전 토목과 1회 졸업생 2명이 입사했는데, 내가 그 중 한 명이었다. 유명 회사니까 다들 쟁쟁했다. 서울대, 연고대 출신이 툭툭 걸렸다. 공전 나와서 입사했다는 자부심으로 일했다. 내가 1회니까 후배들 길이 내 어깨에 달렸다는 책임감도 있었고. 보람도 컸다.

직종별로 한 명씩 주는 우수사원상을 받은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유명 대학 출신이 차고 넘쳤으니 똑똑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나. 난 정말 열심히 일했다. 보령화력발전소 현장에선 한 달에 보름은 새벽 1~2시까지 근무했다. 모범상 받고 제한 기간이 끝나는 5년 만에 다시 수상했다. 여러 사람이 상을 받도록 한 사규상 전무후무한 사례라고 했다. 시상식에 참석한 대림공전 학장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더라. 사장님에게도 내 제자라고 인사시켰던 기억이 난다.”

- 토목 분야 640명 중 최고 성과를 인정받은 셈이다.

“현장에서 생각하고 연구하는 걸 좋아한다. 기존에 사용하던 PF빔을 PC빔으로 바꿔 10억원 이상을 절감했다. 1988년이었으니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교각도 목재거푸집을 쓰던 걸 처음 철재거푸집으로 변경했다. 새로운 시도로 품질도 좋아지고 원가도 절감됐다. 품질관리, 안전관리를 겸직하면서 성과를 거둔 점을 인정받아 상을 받았다.”


- 전문대 출신이란 꼬리표가 걸림돌이 된 적 있다면.

“물론 없지는 않았다. 입사하니 학교는 2년 차이인데 호봉은 4년(8호봉) 차이더라. 대림산업 13년 근무 기간 중 10년을 특진했다. 특진은 열심히 하고 성과를 냈다는 걸 회사가 인정하는 거다. 통상 1년에 2호봉 오르는데 특진하면 3호봉이 올라간다. 그렇게 특진을 거듭해 4년제 출신과의 호봉 차이를 극복했다.”

- 좋은 회사고 열심히 일했는데 나오게 된 계기는.

“대림산업 있는 동안엔 난 어쩔 수 없이 대림공전 출신이다. 난 학교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어쨌든 한계가 있는 거다. 회사에서 나온 한 계기가 됐을 수 있다. 직접적으로는 먼저 나간 회사 동기의 제의로 퇴사를 결심했다. 한 번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때가 구로 전철 현장에서 공무(공사업무)과장 맡고 있던 때였다. 현장 상황이 굉장히 어려웠다. 현장소장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직원들 통제가 제대로 안 됐다. 공무과장이면 현장 살림꾼이다. 이대로 가면 엉망 된다고 후임 소장에게 몇 차례 건의했지만 상황이 잘 안 ?홱? 고민 끝에 동기 제안을 받고 5~6개월 경영수업 한 뒤 따로 나와 지금의 회사를 차렸다.”

- 도전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1992년 창업했으니 20년이 넘었다. 전문건설업체로 시작해 토건종합회사가 됐다. 한창 많이 수주할 때는 매출 150억원까지 나왔다. IMF 위기에도 잘 버텼다. 지금은 직원 12명에 연 매출 70억~80억원을 유지하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항상 열심히는 살았다. 대림산업에서 일할 때도 그랬고. 일하면서 4년제 편입해 야간에 공부하고 대학원까지 다녔으니.”

- 정말 열심히 살았다. 인생의 모토가 도전인가.

“생각하면 늘 도전하며 살았다. 1987년이었으니 대림산업 강릉수력발전소 현장에 있을 때였다. 친구가 경기대에서 편입생을 많이 뽑으니 시험 보라고 권했다.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덜컥 합격했다. 그땐 경기가 어려워서 대기발령 300명씩 내고 권고사직할 때였다. 아내와 아기도 2명 있었고. 개강 전날까지 결정 못하다가 집에 ‘미안하다, 포기 못하겠다’ 그러고, 권고사직 당할 각오 하고 저녁 7시20분 막차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도전해야겠다 싶었다.

회사가 고맙게도 서울(한강 개발 현장)로 발령 내줬다. 사실 낙하산이란 말도 들었다. 그간 열심히 산 걸 인정해 기회를 준 게 아닌가 생각한다. 미사리에서 6시 땡 하면 퇴근하고 충정로에 있는 캠퍼스까지 1시간30분씩 걸려서 수업 들으러 갔다. 꼬박 1년 반을 그렇게 했다. 4학년2학기 땐 구로 전철 현장으로 옮겼다. 회사가 배려해준 만큼 나도 하루도 안 쉬고 일했다.”

- 전문대와 4년제대를 모두 경험했는데 뭐가 다른지.

“공고, 전문대, 4년제대 교육을 다 받았는데 똑같은 과목이다. 정도의 차이가 약간 있을 뿐이다. 자기 위치에서 역할을 하면 된다. 전문대다, 4년제대다 한정지을 필요도 없다. 생활하다 보면 좀 더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럴 때 찾아보면 기회가 많다. 이젠 전문대에도 심화과정, 학위과정이 생기지 않나. 스스로 노력하면 문은 열려있다.”

- 전문대 교수로 있으면서 현실을 보니 어떤가.

“전문대에 강의를 나가면서 느낀 게 있다. 우선 교육과정이 4년제와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면 안 된다. 학생 중심, 실무·현장 위주로 바뀌어야 한다. 취업 상담을 해도 학생의 특성이나 원하는 분야를 고려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부족하다. 성적순대로 학생 추천하면 적성 안 맞는다며 금방 회사에서 나온다. 보통 교수들이 ‘왜 회사까지 가서 아쉬운 소리 해야 돼?’ 그렇게 생각한다. 아직 권위의식이 강한 거다. 난 숱하게 회사들 찾아가 학생들 취업 부탁했다.”

- 전문대 후배들에게 조언 한 마디.

“학교에서 후배들 가르치면서도 늘 하는 말이 있다. 전문대 교육만 받아도 얼마든지 자기 영역에서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거다. 어차피 현장에 가면 다시 배우는 게 많다. 4년제 출신과 출발점이 다르다고 해서 위축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위치에서 업무를 주도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면 충분히 통한다. 이건 내 경험담이기도 하다.”

- 앞으로의 계획은.

“대학 강의는 지난 학기로 끝냈다. 전임교수로 일주일에 4일 학교에 가 聆릿?사업이 타격을 받더라. 이제 10년 정도 더 열심히 일하고 은퇴할 예정이다. 건물이 있으니 야학을 열어 노인 분들이나 다문화가정 이주민들 교육을 해보고 싶다. 음악을 좋아하니 양로원 같은 곳에서 연주 봉사도 하고 싶고. 전문성을 살려 한국 불교 건축양식을 연구해 책을 쓸 생각도 있다.”


◆ 나에게 전문대란…

내게 기회를 준 곳. 어디서든 대림공전 출신이란 사실을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개인사업 하면서도 고향 같은 곳이 대림산업이다. 대림공전을 졸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대림산업에 입사할 수 있었겠나. 1997년부터 강의하면서 졸업 후에도 계속 학교와 인연 맺었다. 후배들에게 늘 그렇게 얘기한다. 전문대 교육 정도만 받아도 어디 가서든 최선을 다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한 마디로 내 인생의 단초를 제공해준 학교다.


천안= 한경닷컴 김봉구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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