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두현 기자 ] 생쥐들이 원형, 네모, 별 모양 방을 드나들 때마다 뇌세포 변화를 측정했다. 이들이 낮에 겪은 일을 기억으로 저장하는 동안, 원형 방에 대한 세포활동만 골라 보상중추를 자극했다. 그랬더니 잠에서 깨자마자 다른 방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원형 방으로 달려갔다. 특정 장소에 호감을 가진 이런 기억을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 신경과학’ 최신호에 따르면 프랑스 연구팀은 영화 ‘인셉션’에서 다른 사람의 꿈속에 들어가 기억을 이식하는 장면처럼 생쥐가 자는 동안 특정 장소에 호감을 갖도록 기억을 심는 데 성공했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장소 세포(place cell)’다. 이는 사람과 동물에게 한 번 가본 곳을 기억하게 하는 뇌 해마 속의 특정 세포로 ‘몸안의 GPS’다. 지난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이 세포 발견자들이 받았다.
수면 중 기억 이식 실험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이스라엘 연구진은 수면 중 무의식을 조작해 금연 실험에 성공했다. 흡연자들이 자는 동안 담배 냄새와 썩은 생선 냄새를 맡게 했더니 실험 후 1주일간 흡연량이 34% 줄었다고 한다. 담배와 썩은 냄새를 연결한 기억 이식의 결과다. 이번 생쥐 연구는 금연 실험보다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연구를 계속하면 끔찍한 사고를 당해 정신적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쥐와 인간의 기억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쥐는 자극에 반응하는 생화학적 기억이지만, 인간은 그것을 여러 층으로 겹치고 연결하는 인지와 성찰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기억저장세포에 저장된 정보 조각들을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왜곡될 수도 있다. 미국에서 무죄가 입증된 사람 중 4분의 3이 목격자의 ‘잘못된 기억’ 탓에 투옥됐다지 않은가.
이처럼 불완전한 상태에서 다른 기억까지 이식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윤대녕 소설 ‘사슴벌레 여자’의 주인공을 보자. 그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받은 기억 때문에 감정까지 전이돼 고통스러워한다. 이식 받은 기억의 주인이 사랑했던 여자 때문에 고통스러운 나는 진짜 나인가 기억의 주인이었던 그 사람인가.
얘기가 너무 어두운 쪽으로 갔다. 좋은 기억을 심어서 나쁜 기억을 없애는 방법은 없을까. 짧은 인생이다. 좋은 기억만 저장하고 사는 길은 없을까. 그러다 특정인에게 맹목적인 호감을 갖도록 기억을 조작하는 일이라도 생기면 그건 또 어떻게 해야 하나. 과학과 철학의 경계에서 봄날의 상념은 끝이 없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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