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 나오면 모(뭐)하냐… 백순데…”
지난 2월 말 연세대 졸업식 날 이런 문구의 현수막이 캠퍼스에 걸렸다.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가 없다는 자조 섞인 한탄이 눈길을 끌었다.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이라도 별 수 없는 상황, 학벌이란 스펙은 필요 없을까. 반응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현실적으로 학벌을 신경 안 쓸 수 없다. SKY라도 힘든데 거길 못 나오면 더 어렵지 않겠느냐.” 고교생 자녀를 둔 한 학부모가 답답해하며 털어놓은 말이다.
이런 현실에서 스펙을 보지 않겠다는 정부의 공언은 공허하게 들린다.
채용시장의 변화는 감지된다. LG그룹은 작년 하반기부터 자기소개서 인턴 경험 등의 기재란을 없앴고 SK그룹은 무(無)스펙 전형을 도입했다. 한국전력공사, 한국도로공사 등 130개 공공기관도 올해부터 스펙을 배제하고 국가직무능력표준(NCS) 기반으로 채용할 방침이다.
하지만 취업준비생들은 의구심을 버리지 못한다. 기존 스펙은 기본이고 ‘또 다른 종류의 스펙’을 원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실제로 한 취업포털 설문조사에 따르면 스펙 초월 채용 추세에도 불구, 공인영어성적(TOEIC)과 자격증 소지 등 평균 스펙은 더 올라갔다. 또 구직자의 80%는 스펙 초월 채용으로 인해 되레 부담감이 늘었다고 답했다. “준비할 게 더 늘어난 것 같다”(53.4%·이하 복수응답) “말로만 스펙 초월이라 하는 것 같다”(51.7%)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막막하다”(47.4%) 등의 이유를 꼽았다.
취업준비생들은 ‘스펙 초월’이란 개념을 가시적이고 수치화된 스펙보다 좀 더 세련된 형태의 스펙을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올해 상반기 삼성그룹 공채의 8단계 입사지원서와 어느새 9종 취업세트까지 늘어난 스펙은 이같은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취업뿐만이 아니다. 입시도 놀랍도록 닮았다. 자율형사립고, 특수목적고 입시부터 대입 학생부종합전형(옛 입학사정관전형)까지 스펙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수험생은 더 바쁘다. 원서 접수 한두 달 전부터 자기소개서를 쓰기에 여념이 없다.
몇 자 되지 않는 자소서 쓰기가 왜 그리 힘들까. 글솜씨가 모자란다거나 쓸 거리가 없다는 건 기초적 고민에 속한다. 자소서의 ‘진짜 관건’은 표시나지 않게 자신의 스펙을 담아내는 것이다. 명시적으로 스펙을 요구하진 않지만 자소서를 채우기 위해 학생들은 학업 공부 외에 뭔가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차라리 수능 성적만으로 평가하자”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취업도 입시도 비슷한 상황. 중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지금의 청년층과 유년층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스펙 초월 뒤에 숨은 슈퍼맨에 대한 요구다. ‘연대 나오면 뭐하냐’는 말엔 스펙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뭔가를 해야 한다는 짓눌린 무게감이 실려 있다.
그간 젊은 세대를 지칭하는 말은 다양했다. X세대, N세대 등의 별칭으로 불릴 때도 있었다. 최근으로 오면서 88만원세대, 오포세대, 달관세대 같은 용어가 붙었다. 짙게 드리워진 청년실업 그림자 위에 비정규직, 포기, 체념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물론 기본적 방향이나 취지 자체가 틀린 건 아니다. 다만 현실에서 통하려면 세밀한 조치가 필요하다. 왜 현실의 취업준비생과 수험생들이 힘겨워 하는지, 왜곡된 구조에 대한 통찰과 근본적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 다음번에 불리는 ‘OO세대’란 신조어는 보다 밝은 방향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한경닷컴 김봉구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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