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드 부크홀츠의 ‘러쉬’가 발간되자마자 필자는 내용도 보지 않고 샀다. 이유는 부크홀츠가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란 책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를 감명 깊게 읽었던 관계로 부크홀츠가 쓴 책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러쉬’는 이런 필자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 책은 요즘 유행하는 ‘행복전도사’들의 대책없는 ‘경쟁 혐오론’을 반박하는 발칙한 책이다. 필자의 권유로 이 책을 읽은 한 학생은 “처음에는 욕이 튀어나오는 것을 참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 학생은 인내를 갖고 읽기 시작하자 어느 틈엔가 “이 책에 매료되어 빨려들어갔다”고 했다. 다 읽었을 때의 느낌은 “정말 이렇게 생각해도 될까? 혹시 사기당한 것은 아닐까?”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고 학생은 고백했다. 너무나 기존 상식(?)과 다른 이야기이기에 이와 같은 이질적 의견에 동감하게 된 자신의 모습에 놀랐다는 것이다.
부크홀츠는 “행복은 바쁘게 움직이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솔직히 이 말에 100%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개념은 극히 주관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분명 기업가 정신에 충만한 도전적인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 않은가. 수도원에서 명상을 즐기는 수도사의 행복은 다른 데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이 제기할 수 있는 문제다. 그렇다. ‘행복’은 주관적이며, 사람마다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국민에게 ‘행복’을 줄 수는 없다. 정부가 보장해야 하는 것은 ‘행복권’이 아니라 ‘행복 추구권’이다. 우리는 저마다가 느끼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바로 그런 ‘행복을 향한 경쟁’ 속에 있다.
자칭 멘토라고 하는 행복전도사들의 문제는 한 사람에게만 쉬어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전체를 쉬어 가라고 한다는 점이다. 권고 정도가 아니다. 국가 입법을 통한 ‘강제’를 통해 전체 사회를 인위적으로 경쟁 없는 사회로 만들려고 한다. 행복전도사들은 흔히 말한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라고. 맞는 말이다. ‘돈=행복’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경쟁 없이 오늘날과 같은 물질적 풍요가 이뤄질 수 없었으며, 경쟁이 사라진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물질적 풍요가 필요 없으며 따라서 경쟁 없이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일단 논의하지 않겠다. 단지 정말 그렇다면 “당신은 물질적 풍요를 포기하고 살라”고 권하고 싶다.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서 움막을 짓고 살든, 네팔의 히말라야 산 속에서 도(道)를 닦든 그것은 귀하의 자유이며, 말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또 경쟁 없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뜻을 지닌 동료들과 그런 공동체 마을을 만들어 살라고 권하고 싶다. 필자의 과거 학생운동 동지들 가운데는 그런 이상적(?) 공동체를 만들어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그런 사고를 남에게 강제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이 경쟁을 포기하고 살더라도 굶어죽지 않는 사회가 된 것 자체가 ‘경쟁 사회’이기 때문이란 사실이다. 인류가 물질적으로 제대로 살기 시작한 것은 200년 남짓하다. 그리고 이런 체제는 ‘경쟁’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런데도 일부 유토피아주의자들(부크홀츠는 에덴주의자라고 표현한다)은 ‘고상한 야만인’이라는 실체하지 않은 가상의 존재를 미화하며, 이들의 삶을 동경한다. 필자도 어린 시절 ‘부시맨’이란 영화를 보고 감명받은 일이 있다. “저렇게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들을 흉폭한 자본주의가 파괴시키다니”라며 도덕적 분노를 느낀 적도 있다.
그러나 실재하는 부시맨 사회는 결코 이상과는 거리가 먼 곳이 駭? 평균수명도 40세를 넘지 못했다. 살인으로 죽을 확률이 뉴욕 뒷거리 우범지대에 있는 것보다 높았다. 도시의 바쁜 삶에 지친 영혼이 잠시 관광 가서 몸과 마음을 추스를 때, 그런 곳을 이상적이라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잠깐 휴식하는 당신이 아니라, 그곳에서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의 실제 삶은 평온이 아니라, 생존 투쟁이다.
아니 논쟁하지 말자. 당신에게는 최소한 선택권이 있다. 그런 곳에 가서 그 같은 삶을 살면 된다. 이곳에 남아 경쟁에 지쳐서 한탄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 경쟁을 즐기며 경쟁을 통해 자아의 발전을 꿈꾸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까지 ‘당신의 에덴동산’을 선물하려고 하지 마라.
필자는 지금 이 글을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우아한 클래식을 들으며 쓰고 있다. 4500원짜리 카페라테를 즐기면서. 경쟁이 없었다면 이 같은 카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칙칙한 다방에서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물론 카페가 좋은지, 다방이 좋은지도 극히 주관적 선택이다. 지금도 시골 역 부근에는 전통적 다방이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경쟁을 통해, 우리는 선택의 자유를 얻었다는 점이다. 또 커피값만 하더라도 그렇다. 중세 유럽에서 한때 커피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싼 음료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4500원도 커피값이라기보다는 자릿값이다. 커피 자체의 가격은 한없이 낮아졌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생필품 가격이 저렴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이 모든 것이 ‘경쟁’ 덕분이다. 그리고 이 ?‘경쟁’은 경쟁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이탈한 사람들에게마저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게 만드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아니, 최근 ‘행복’에 대한 탐구 자체가 ‘경쟁 체제’가 만들어 놓은 물질적 풍요의 기반 위에서 이뤄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행복전도사 대부분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은 달콤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실 세계는 그렇게 달콤하지만은 않다. 삶이란 녹녹한 것이 아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경쟁을 포기하라는 말은 삶을 포기하라는 말에 불과하다. ‘러쉬’에 나오는 한 구절로 결론을 대신하겠다. “나르시시즘과 우울을 치료할 수 있는 최고의 약은, 도피할 길을 막고 현실에 맞부딪쳐 투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황성준 < 문화일보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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