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늦게 출발한 자의 이익' 걷어차는 행위들

입력 2015-04-06 07:52   수정 2015-04-07 19:00

재정난 EU국 과잉 복지·연금 축소
우린 유럽의 꿈만 좇아 정반대 행보
현실을 교훈 삼아 미래를 설계해야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경제학 >



세계적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이 유러피언 드림을 얘기한 지 10여년이 지났다. 리프킨은 아메리칸 드림과 유러피언 드림을 극명하게 대비시켰다.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 내의 관계를, 획일성보다 다양성을, 부의 축적보다 삶의 질을, 무제한적 발전보다 환경보전적 지속가능개발을, 재산권보다 보편적 인권을, 일방적 무력행사보다 다원적 협력을 염두에 두는 유러피언 드림의 가능성이 제시되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런 대비는 상당히 단순하고 추상적이다. 한쪽은 건조한 물질주의적 접근을 중시하고 다른 쪽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인본주의적 접근을 중시한다고 해놓고 어느 쪽이 우월한지 묻는다면 답은 명약관화하다. 그러나 최근에 관찰되는 유럽의 모습은 유러피언 드림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다. 유럽 재정위기 이후 유럽 국가들은 상당한 갈등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한쪽은 자신이 구축한 막대한 부채에 대해 책임지지 않은 채 다른 국가들에 부담을 전가하려 들고, 다른 쪽은 이에 대해 손을 젓는 모습을 보면 배려와 공동체적 가치에 대해 의구심마저 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21곳이 유럽연합(EU) 국가? 회원국 중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위스 3개국은 EU에 가입하지 않았으니 유럽국가는 24개국인 셈이다. OECD의 70.5%가 유럽 국가들인 것이다. 유럽 재정위기의 원인이 된 5개국 머리글자를 따서 PIIGS라고 부른다. ‘돼지들’이란 의미를 전달하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이들 5개 위기국은 모두 OECD 창립 회원국들이다(이탈리아만 창립 1년 후 가입).

‘늦게 출발한 자의 이익’은 앞서 간 사람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 먼저 간 사람이 낭떠러지를 향해 가다가 유턴해서 돌아오고 있는데 뒤에 가는 사람이 무작정 뒤를 따라간다면 이는 큰 문제다. 최근 복지가 이슈화되는 과정에서 ‘OECD 평균’에 못 미친다는 식의 평가를 하는 목소리들이 높다. OECD 구성국들의 70.5%가 유럽 국가들이니 ‘OECD 평균’은 곧 유럽의 모습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유럽 국가들이 복지나 조세와 관련한 제도에 대해 어떤 접근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가.

위기국들은 복지와 연금혜택을 줄이느라 법석이다. 독일의 경우는 어떤가. 독일은 10여년 전 ‘하르츠 개혁’을 통해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임으로써 ‘유럽의 병자’로부터 ‘유럽의 슈퍼스타’로 도약했다. 하지만 노동유연성 제고와 비정규직 확대는 유러피언 드림과는 거리가 있다. 이에 비해 프랑스는 과도한 복지와 노동시장 경직성 등으로 인해 경제가 힘들어지면서 ‘유럽의 시한폭탄’이란 비아냥까지 듣고 있지만 자기들도 과도하다고 느끼는 많은 제도들을 뜯어고치지는 못하고 있다. 고치고 싶지만 못 고치는 제도가 바탕이 돼 나타난 수치들도 포함돼 있는 것이 ‘OECD 평균’이라면,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늦게 출발한 자의 이익’을 날려 버리는 행위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미국은 상당 부분 위기를 극복했지만 유럽 재정위기는 아직 진행형이다. ‘저부담 저복지’를 특징으로 하는 아메리칸 드림은 상처가 아물고 있지만 ‘고부담 고복지’의 유러피언 드림은 중환자실에서 신음하고 있다. 공동체, 배려, 지속가능성, 다양성, 삶의 질…. 이들은 유러피언 드림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아도 누구나 동의하는 고귀한 가치들이다. 그러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던 공산주의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추구하는 가치가 우월하다고 결과까지 우월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제는 우리도 많이 성숙했다. 복지나 세금과 관련해 입만 열면 ‘OECD 평균’이니 ‘무상’이니 하는 얘기를 습관적으로 들먹이기보다는 세심하고 본질적인 접근을 통해 ‘코리안 드림’을 구축해야 한다. ‘늦게 출발한 자의 이익’을 향유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시점이 왔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경제학 chyun3344@daum.net<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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