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병욱 기자 ]
한국에서 시속 300㎞ 이상의 고속철도가 처음으로 상업운행을 한 날은 2004년 4월1일이다. 당시 열차 46대 가운데 12대는 프랑스 알스톰에서 완제품으로 들여왔고, 나머지 34대는 프랑스로부터 전수받은 기술을 토대로 국내 업체가 만들었다. 한국고속철도(KTX) 시대가 열렸다고 했지만, 다른 나라의 도움 없이는 고속열차를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확하게 11년 뒤인 지난 1일 호남고속철도 개통식(상업운행은 2일)이 열렸다. KTX라는 이름은 같았지만, 국내 업체가 순수 독자기술로 만들었다는 점은 달랐다. 11년 전 프랑스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고속열차를 만든 국내 기업 현대로템(당시 이름은 로템)은 이제 독자적으로 고속열차를 생산하고 있다. 나아가 해외에 고속철을 수출하려는 시도까지 하고 있다.
11년 전 경부KTX가 개통하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리는 시간은 3시간 아래로 떨어졌다. 호남KTX는 호남권 지역 사람도 반나절이면 서울을 오갈 수 있게 만들었다. 광주에서 서울까지 평균 1시간47분, 목포에서 서울까지 평균 2시간29분이 걸린다. 현대로템의 독자기술이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바꾼 것이다.
6 ?만에 독자기술 개발
경부KTX 사업은 정부가 1989년 5월 고속철도 건설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됐다. 1년 뒤인 1990년 6월 고속철도 건설계획안이 확정됐고, 1994년 6월 프랑스 알스톰과의 차량 도입 계약 및 고속철도 기술이전 협약이 체결됐다. 그러나 프랑스 알스톰으로부터 차량 핵심 기술을 이전받지 못했고, KTX 운행과는 별개로 고속철 핵심 기술 개발이 시작됐다. 현대로템과 국책연구소 등은 1996년부터 ‘G7’이라고 이름 붙여진 한국형 고속철 개발 연구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 목표는 최고 시속 350㎞의 고속철을 독자 기술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철도 분야에 대한 연구개발 실적도 부족하고 기술인력도 취약한 상황이었지만, 이 프로젝트는 6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성공을 거뒀다.
G7 프로젝트는 이후 첫 국산 고속철인 KTX-산천의 근간이 됐다. 현대로템은 2008년 국내 기술로 개발한 KTX-Ⅱ(현 KTX-산천)의 제작을 완료했다. 국산화율은 87%에 달했다. 일본과 프랑스, 독일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시속 300㎞급 고속열차를 독자적으로 개발·제작한 것이다. 한국에 철도가 달린 지 111년 만이다. KTX-산천을 개발하기 위해 1996년부터 2007년까지 국고 1051억원, 민간자본 1049억원이 들어갔다. 철도기술연구원과 현대로템 등 70여개 기관 및 기업에서 900여명의 연구 인력이 투입됐다.
이런 노력의 결과물인 KTX-산천은 2010년 3월 처음으로 운행을 시작했다. 일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다섯 번째다. KTX-산천은 기존 알스톰이 냘건求?KTX 열차에 비해 유지보수가 쉬워졌고 소음 차단 효과와 안정성이 향상됐다. 승객 편의성도 나아졌다. 좌석 간 거리가 기존 930㎜에서 980㎜로 50㎜ 늘어났고, 모든 좌석의 방향을 바꿀 수 있게 돼 이른바 ‘역방향’ 좌석이 없어졌다. 객차 차폭은 2904㎜에서 2970㎜로 커졌다.
현대로템은 사고 발생 방지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1년 4월부터 코레일 고양기지에 기술자를 상주시켜 차량 고장 발생에 대비하고 있다. 하자가 발생한 차량이 아니더라도 미리 공장으로 이송해 종합점검을 하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KTX-산천의 품질 경쟁력도 한 단계 높아졌다. 코레일은 2012년 국제철도연맹(UIC)으로부터 안전 분야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KTX-산천 성능 극대화한 호남고속철
호남고속철도는 KTX-산천의 성능을 극대화하고 기존의 문제점을 대폭 개선한 고속철이다. 현대로템은 설계 초기 단계부터 호남고속철의 품질 향상에 주력했다. 설계 품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협업설계를 강화했다. 협업설계란 생산기술·부품·품질 협력사가 설계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해 공동으로 설계하는 활동이다. 협업설계를 통해 설계 변경을 최소화하면서 생산을 조기에 안정화할 수 있었다는 게 현대로템의 설명이다.
현대로템은 또 초도품(처음 만들어진 철강 제품으로 기계류 제작 등에 사용되기 전 단계)을 꼼꼼하게 점검해 협력사가 납품하는 각종 부품과 자재에 대한 품질 강화를 유도했고, 품질 혁신을 위해 적극적인 투자를 이어오고 있다. 아울러 제작도면을 만들기 전에 부품과 장치 등을 3D로 설계해 장치 간 간섭 여부, 조립성, 편의성 등을 사전에 검증하고 있다. 현대로템 관계자는 “이 과정을 통해 개별 부품의 안정성이 아닌 차량 전체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병석 현대로템 철차연구1실 이사는 “고속철도는 전기, 전자, 통신, 철강, 토목기술 등이 결합한 첨단기술의 집합체로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통합 관리가 이뤄져야 한다”며 “전국 고속철 시대를 맞아 더욱 안전하고 편안한 고속철이 운행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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