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발해는 결코 중국사가 될 수 없다

입력 2015-04-10 17:31  

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13)

(12) 원효와 의상, 서로 다른 길을 가다
(14) 지금 내 옆에는 누가 있나?
(15) 역발상으로 국가를 지키다
(16) 송나라 사신이 감탄한 고려청자
(17) 김윤후, 몽골 침략에 온몸으로 맞서다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한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만주 지역 동북 3성의 역사와 문화를 재해석하는 국가 사업이었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중국 민족주의의 강화로 이어지며 이 지역의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역사인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사가 모두 중국사라는 것입니다. 정말 황당무계하지요?


중국의 역사 왜곡, 동북공정

특히 만주 지역은 물론 오늘날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까지 차지했던 우리 민족 국가 발해에 대해 말갈족의 국가라는 역사 왜곡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당이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다며 따라서 우리 민족 국가도 아니고, 당나라 변경에 있던 지방 정권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중국 역사에 발해의 역사를 귀속시키려는 의도입니다.

瀏릿摸?이를 반박하고 중국의 역사 왜곡을 증명할 수 있는 역사적 유물과 기록이 있을까요? 저는 1980년 중국 지린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발굴된 한 무덤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792년 6월에 36세로, 아버지였던 왕보다 먼저 사망한 발해 정효공주입니다. 그녀는 문왕의 넷째 딸이었는데요. 여기서 묘지석이 하나 출토됐습니다.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이라는 꽤 긴 이름이 나옵니다. 정효공주의 아버지는 바로 ‘대흥’ 그리고 ‘보력’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발해 3대왕 문왕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묘지석의 이름처럼, 당시 중국의 황제만이 쓰는 연호를 발해도 독자적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유교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감동한다는 ‘효감’이라는 글자와 ‘금륜성법대왕’이라고 하여 불법을 수호하는 왕이라는 불교의 왕명을 활용하는 등 최고의 존칭들만 모아 사용하였지요. 사실 중국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연호를 발해는 이미 1대 왕이었던 대조영 때부터 사용합니다. 그의 연호는 ‘천통’, 2대 대무예 무왕도 ‘인안’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어요. 그렇다면 발해가 연호를 사용한 것 이외에 또 다른 증거는 없을까요? 2대왕 무왕은 당과 대립각을 세워, 장문휴를 시켜 당의 산둥반도를 공격하는 담대함을 보여줍니다. 당의 일개 지방정권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공격이지요.

당과 대등한 황제국임을 내세운 발해

자, 그런데 발해 3대 왕인 문?때부터 무언가 헷갈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분명 연호를 사용하지만 당나라의 문물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합니다. 당나라 중앙 제도인 ‘3성 6부’가 유사하게 발해에서도 시행되고, 수도 상경용천부에 당의 수도인 장안성을 본따 ‘주작대로’를 건설합니다. 그럼 정말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라서 이렇게 따라한 걸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결코 아닙니다. 마치 패션에도 유행이 있듯 당시 세계사적으로 국제적인 교류의 중심에 있었던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지요. 발해 문왕은 당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되 여기에 종속되지 않고 거꾸로 발해도 당당한 황제국가로 만드는 이중 전략을 택한 것이에요. 당의 3성6부라는 중앙 제도는 발해에서 명칭과 운영면에서 독자성이 엿보입니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중심이 돼 그 아래에 좌사정과 우사정이라는 이원적 운영체계를 만들고 ‘이·호·예·병·형·공부’의 당나라 6부가 아닌 ‘충·인·의·지·예·신’이라는 유교적 명칭을 사용하였지요. 더구나 이미 황제국인 당나라처럼 3성6부를 쓴다는 것 자체가 지방정권이 아니라 당과 동등한 국가임을 나타냅니다. 또한 수도를 몇 번 옮겼는데, 특히 오늘날 중국 헤이룽장성 근처 목단강 유역인 상경용천부로 옮기고 당의 장안성을 모방한 주작대로를 만들었어요. 이는 단순한 수도 천도가 아니라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함과 동시에 북쪽의 말갈족을 효율적으로 제압하고 통치하기 위해 수도의 위상을 장안성만큼 높인 것이지요.

고구?계승하고 문물을 발전시킨 발해 문왕

한편 발해 문왕은 일본과도 사신을 교환하며 우호 관계를 넓혔는데요. 758년 사신단을 일본에 보냈을 때 국서에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러자 일본에서도 문왕을 고려왕이라고 인정하는 국서를 보내왔어요. 즉, 당시 대외적으로 발해는 엄연히 독자적인 국가이자,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인정받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문왕을 당나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때 발해의 황제를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 낮추어 불렀던 당도 762년부터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불렀습니다. 국력이 커진 발해를 당나라도 인정한 것이지요. 이런 치세를 통해 문왕은 만주와 연해주, 그리고 한반도 북부를 다스리는 대제국으로 발해를 발전시킵니다. 오히려 옛 고구려의 전성기 때보다도 2배 정도 훨씬 큰 영역을 다스리게 되었지요. 마치 고구려 시조 주몽처럼 ‘천손’, 즉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우는 동시에 유연한 통치와 외교 관계로 8세기 동아시아에서 발해는 당당한 자주 독립 국가로 위상을 떨치게 됩니다.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 묘에서 발견된 돌사자상이 있습니다. 마치 고구려를 이은 듯 앞다리를 곧게 펴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위용이 당시 명실상부하게 동아시아의 독자적 국가로 발돋움한 발해를 연상케 합니다. 서태지의 노래 제목처럼 오늘 발해를 꿈꿔봅니다.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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