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시의 서울역 역세권 개발계획으로 주목받는 서소문 밖 중림동 봉래동 일대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후기 상업 발달사와 천주교 박해의 현장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 귀퉁이에 ‘칠패시장터’라는 표지석만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다. 너무 쉽게 잊는 한국인의 속성을 보는 듯하다.
서소문 밖 칠패(七牌)시장은 종로의 종루(鐘樓), 동대문의 이현(梨峴·배오개)과 더불어 한양의 3대 시장이었다. 칠패는 어영청의 7번째 순찰구역이자 경찰 기능의 순청(巡廳)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사람들 왕래가 많은 숭례문과 가깝고, 마포 서강 등지로 들어온 어물 곡물 등 생필품 집결지로 최적의 입지였다. 주한 프랑스대사관이 있는 합동(蛤洞·조개 집산지), 포동(布洞·베 집산지) 같은 지명에서도 그 흔적이 발견된다.
18세기 후반 칠패시장은 이현시장과 더불어 어물 판매량이 시전(市廛)의 내·외어물전보다 10배나 많았다고 한다. 칠패시장의 노점상인 난전(亂廛)을 관의 허가를 받은 특권상인인 시전(市廛)이 단속하는 등 마찰도 잦았다. 그러나 1791년(정조 15년) 시전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이 폐지된 이후 종루의 시전마저 능가하는 거대 시 揚막?컸다. 당시 조선이 천주교 신자를 이곳에서 처형한 것도 인파가 많은 저잣거리에 효수해 공포심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이곳은 경성수산시장으로 바뀌었고 광복 뒤 중림시장으로 자리잡았다. 1970~80년대 상인들이 노량진과 가락시장으로 대거 옮겨갔고, 인근 지역 재개발로 지금은 어시장으로서 명맥만 잇고 있다. 중림동에는 한양의 5대 싸전(쌀시장)도 있었다. 중림동(中林洞)은 1914년 일제 경성부가 서울을 186개 동으로 나눌 때 당시 약전중동과 한림동에서 한 자씩 따온 이름이다.
봉래동과 중림동을 잇는 염천교(鹽川橋)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화약제조 관청인 염초청이 부근에 있어 이름을 따왔다는 설과, 무악재 부근의 본래 염천교를 헐고 이곳에 다리를 놓으면서 이름도 가져왔다는 설이다. 거지왕 김춘삼이 살았다는 염천교는 이곳이 아니고 청계천 5가 방산시장 부근이었다.
서울시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서울역고가 공원화 및 중림동 만리동 일대의 현대화 사업을 계기로 이 지역이 확 달라질 모양이다. 벌써부터 땅값이 뛴다는 소문도 있다. 경의선 철길에 가로막혀 도심 낙후지역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곳이다. 옛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이곳이 어떻게 바뀔지 귀추가 주목된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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