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의 덫'에 빠진 대한민국

입력 2015-05-04 21:42  

개혁 이끌어낼 리더십 실종
다수결 부정한 국회선진화법
사회적 합의 매달리는 포퓰리즘

공무원연금 '반쪽 개혁'에 국민연금 졸속합의 '후폭풍'



[ 정종태 기자 ]
좌초, 졸속, 후퇴…‘사회적 합의’ 매달리다 4대개혁 무산 위기

개혁 대상이 합의 주체로 참여 ‘어깃장’
표 의식한 여야, 구조개혁 엄두도 못내
청와대는 리더십 발휘보다 정치권 탓만


공무원연금 졸속 개혁의 후폭풍이 거세다. 당초 목표했던 ‘구조 개편’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기여율과 지급률 등 일부 숫자 조정으로 일단락되면서다. ‘반쪽짜리 개혁’이라는 비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공무원연금 제도를 바꾸면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소득 대비 연금액)을 높이기로 여야가 전격 합의해 국민연금의 재정 고갈 시기가 앞당겨지게 됐다. 혹을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였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공무원연금 개혁 논의가 거꾸로 가게 된 것은 정치권이 개혁의 본질보다는 ‘합의’를 하는 데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국회선진화법이 발효된 뒤 민주주의 의사결정 원칙인 다수결은 불가능해졌다. 이해 당사자들의 표를 의식한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이 만연하고, 설득과 과감한 상황 돌파를 해야 하는 ‘정치 리더십’은 실종됐다. 그러면서 정치권이 ‘합의의 덫’에 빠져들고 있다는 게 많은 전문가의 지적이다.

공무원연금 개혁 논의는 지난해 10월28일 박근혜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으로 시작됐다. 박 대통령은 당시 “역대 어느 정권도 못 해본 공무원연금 개혁을 이 정부에서는 해보려 한다”며 정부와 정치권에 개혁 방안 마련을 당부했다. 하지만 정치권은 연금 개혁에 ‘뜻’이 없었다. 논의가 시작되자마자 여당 지도부는 공무원연금 소관 부처인 행정자치부에 방안을 마련해오라며 공을 넘겼다.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꼴’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400만명에 달하는 공무원 가족 표를 생각하면 정치권이 공무원연금 개혁의 총대 메기를 기대한 것은 무리였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정부를 독려해 개혁안을 마련하기보다는 ‘선거가 없는 1년 동안이 개혁의 골든타임’이라며 정치권을 압박하는 데만 골몰했다. 여야 정치권은 여론이 공무원연금 개혁에 우호적인 것으로 나오자 마지못해 공무원연금개혁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여야는 공무원연금개혁특위를 가동하면서 공무원단체 등 이해 당사자가 포함된 대타협 기구도 동시에 운영했다. 대타협기구는 특위 산하였지만 특위 논의 내용을 추인하는 상위 기관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보니 공무원연금을 국민연금 수준으로 낮춰 통합하자는 ‘구조 개혁’ 논의는 실종될 수밖에 없었다.

기여율과 지급률 숫자를 얼마나 올리고 낮출지를 놓고 줄다리기만 벌어졌다. 정치권 관계자는 “이해 당사자이자 개혁 대상인 공무원단체를 합의 주체로 끌어들이는 순간 이미 개혁의 취지는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청와대와 정부의 리더십도 작동하지 않았다. 여권 관계자는 “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정치권은 그렇다 치고, 개혁에 앞장을 섰던 청와대와 정부도 공무원연금 개혁의 필요성과 목표치를 분명히 제시하고 이해 당사자를 설득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다”며 “오로지 정치권을 압박해 해결하려 했던 것이 전부였다”고 지적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부 교수는 “공무원연금 개혁처럼 이해 당사자의 반발이 불을 보듯 뻔한 과제는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결론 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며 “사회적 합의에 맡겨두기보다는 설득을 통해 개혁을 이끌어내는 리더십이 무엇보다 필요했다”고 말했다.

○노사정위도 성과 없어

공무원연금 개혁과 함께 4대 부문 개혁에 최우선 순위를 뒀던 노동 개혁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노동시장 구조개선 방안을 마련할 대타협 기구로 지난해 9월 노사정위원회를 가동했다. 여기에는 노측 대표로 한국노총이, 사측 대표로 한국경영자총협회가 협의 주체로 참여했다.

하지만 노사정위는 지루한 논의 끝에 노사 양측의 이견만 확인한 채 지난 4월 초 아무런 결론 없이 활동을 끝냈다. 7개월을 허비한 셈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던 청와대는 물론 정부의 리더십도 보이지 않았다.

박근혜 尹酉?두 차례 노사정위 위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대타협 정신을 강조했지만 노사 양측에는 ‘쇠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었다. 노사정위가 결렬되자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노사정위에서 공감대를 이룬 통상임금 범위 구체화, 근로시간 단축 등에 대해 우선적으로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이 역시 국회로 넘어갈 경우 야당이 벼르고 있어 처리가 쉽지 않다.

이런 마당에 청와대와 정부 일부에선 노사정위의 틀을 복원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박기성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노사정위가 실패한 이유는 국가의 정책적 판단에 이해 당사자들이자 사적 이익집단이 직접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의 주체로 나섰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국가의 공적 영역과 사적 자치의 영역이 엄격히 구분되지 않으면 객관적이고 올바른 결론이 나올 수 없다”며 “노·사·정이 한자리에 모여 대화와 타협으로 노동 개혁에 합의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지난 17년간 노사정위 운영의 결론”이라고 강조했다.

○‘합의를 위한 합의’ 많아져

공무원연금 개혁이 ‘용두사미’로 끝난 데는 ‘다수결로 결정’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무시되고 있는 탓도 크다. 여당 지도부가 청와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야당의 요구사항이었던 ‘공적연금 보전 및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을 수용한 것은 ‘판 자체가 깨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는 게 새누리당 관계자들의 얘기다. 공무원연금을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지보다는 ‘어떻게 해서라도 합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의석 과반을 차지한 여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갖고 국민을 설득하기보다는 야당의 눈치를 보는 데 급급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정종태 기자 jtch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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