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동·일본 민주당의 몰락
'무상·퍼주기' 따라가는 한국 정치권
"정치권, 연금 파동 계기 표(票)퓰리즘과 결별해야"
[ 안재석 기자 ] 지난 3월 말 영국 총선이 공식 선거전에 들어가자 노동당은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성격이 강한 공약을 대거 쏟아냈다. 공격 목표는 ‘가진 자’였다. 200만파운드(약 34억원) 이상의 고급 주택에 ‘맨션세’를 부과하고, 개인소득세 최고 세율을 45%에서 50%로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연료가격 상한제 등 서민의 표심이 흔들릴 만한 달콤한 공약도 포함했다. 영국 언론들은 곧바로 에드 밀리밴드 노동당 대표에게 ‘레드 에드(Red Ed)’라는 별명을 붙였다. ‘빨갱이 에드’쯤으로 해석되는, 우려 섞인 표현이었다. 집권 보수당은 반대로 갔다. 복지 분야 예산을 삭감하고, 기업의 법인세를 깎아주겠다는 비(非)인기 정책을 내걸었다.
총선 직전까지 노동당의 전략은 먹혀드는 듯했다. 영국 공영방송사인 BBC는 선거 직전 여론조사를 통해 보수당과 노동당의 득표율을 각각 34%와 33%로 예측했다. 오차범위 내 박빙이라는 의미다. 뚜껑을 열자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보수당이 전체 650석 중 331석을 차지하며 압승했다. 노동당은 종전 258석보다 26석 적은 232석을 얻는 데 그쳤다. 1997년 집권 당시 418석이던 것과 비교하면 거의 절반 의석으로 추락한 것이다.
포퓰리즘이 일개 정당의 운명만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의 미래마저 좀 먹는다. 그리스 아르헨티나 등 사례는 넘쳐난다. 일본도 비슷한 일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다. 만년 야당이던 일본 민주당은 2009년 총선에서 헌정사상 단일 정당 최다 의석을 확보하며 집권여당이 됐다. 당시 민주당 공약집엔 선심성 정책이 빼곡했다. 아동수당 지급과 고속도로 무료화, 공립고교 전면 무상화 등 ‘3대 무상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국민은 환호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민주당이 공약 실천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데 실패해 두손을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3년4개월 만에 정권은 다시 자민당으로 넘어갔다. 이후 민주당은 단 한 번의 반전 기회도 잡지 못하고 있다. ‘무상(無償)의 저주’는 그만큼 길고 질기다. 민주당의 현재 지지율은 7%. 거의 당 해체 수준이다.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다. 지난 2일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하고 무산됐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인상’이라는 문구가 발목을 잡았다. 야당은 공무원연금 개혁안 논의 막판에 느닷없이 국민연금을 끌어들였다. 여당도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여론의 역풍을 맞자 서로 남 탓을 하며 우왕좌왕하고 있다.
공무원연금 개혁 무산은 여야의 합작품이다. 양쪽 모두 젊은 세대의 부담과 대한민국의 미래엔 애써 눈을 감았다. 공무원노조라는 ‘결집된 유권자’의 이익을 대변한 ‘고객 정치’에만 몰두했다. 일종의 ‘맞춤형 포퓰리즘’이다.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는 “한국의 여야 모두 일본 민주당의 몰락 과정을 점점 닮아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미래 세대를 생각하지 않는 포퓰리즘적 행태는 결국 자기 자신들의 미래를 갉아먹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경제부처 관계자는 “공무원연금 파동을 교훈 삼아 정치권이 이제 합리적인 선택지를 국민에게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포퓰리즘의 유혹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눈앞의 선거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결단이다. 하지만 그게 당과 나라를 모두 살리는 길이라는 데는 이견을 찾기 힘들다. 지구 상에 탄탄한 재정을 갖춘 선진국이 몇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