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제자 3인이 말하는 '스승' 박목월·서정주·황순원

입력 2015-05-15 10:27   수정 2015-05-15 18:49

윤재웅 동국대 교수 "언어·종교 섭렵…깨어있던 미당"
박상천 한양대 교수 "미소 잃지않고 쉽게 가르친 목월"
김종회 경희대 교수 "황순원 소설, 한국 현대사 관통"



☞ 14일 ‘탄생 100주년 박목월·서정주·황순원… 대학의 브랜드였다’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 김봉구 기자 ] 남도 특유의 여유로운 태도로 강의한 ‘걸어다니는 문학사’ 서정주, 학생 하나하나 손 잡아가며 문학이론을 쉽게 풀어 설명한 박목월,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지론으로 소설 외의 잡문을 거의 남기지 않은 ‘외유내강’ 황순원.

제자들의 기억으로 재구성한 스승 박목월, 서정주, 황순원의 진면목이다. 한국 문학의 거목이었던 이들은 교수로서도 당대의 아이콘이자 대학의 브랜드였다.

한경닷컴은 15일 이들의 제자인 윤재웅(동국대) 박상천(한양대) 김종회(경희대) 교수에게 생전 스승의 모습을 물었다. 작품으로 접하는 유명 시인·소설가와는 또다른 인간적인 선생의 면모가 생생한 목격담으로 되살아났다.

각자 스타일은 달랐지만 “부드럽고 자애롭게 학생들을 대했다”고 제자들은 입을 모았다. 단순한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고 제자와의 대화를 즐긴 것도 공통점이다.

정년퇴임 후까지 제자들의 과제물과 성적표를 소중히 보관하는가 하면(서정주) 좀처럼 작품에 대해 설명하지 않지만 제자의 질문엔 성실히 답해주는 선생(황순원)이었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가르치는 자세(박목월)에 감명 받은 제자가 자신의 롤모델로 삼기도 했다.

◆ 소설가 되려했던 미당 서정주

동국대 국문과 81학번인 윤재웅 교수(국어교육과)는 이미 은퇴한 미당의 강의를 듣는 행운을 누렸다. 2학년이 되던 1982년 소설론 수업에서였다. 담당 교수가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겨 ‘대타’로 수업을 맡은 이가 다름아닌 미당이었다.

“학생들이 당황했죠. 미당 선생님이 소설을 강의한다니까요. 수업 첫 말씀이 기억납니다. ‘나는 소설가가 되려 했고, 김동리는 시인이 되려 했지’라고 하셨죠.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두루 알려고 열심이었다고 하시더군요. 당신 스무 살 무렵엔 도스토예프스키 전집도 독파했다고.”

윤 교수가 기억하는 강의실에서의 미당은 열정적이진 않았지만 언제나 여유로웠고 학생들을 자애롭게 바라보곤 했다. 느릿한 남도 목소리로 풀어놓는 당대 문인들과의 교유(交遊)에 학생들은 쫑긋 귀를 세웠다. 시인 이상·신석정·김영랑·정지용 등과의 ′퓬撚弱?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윤 교수는 “우리가 미당 선생님께 붙인 별명이 ‘걸어다니는 문학사’였다”고 귀띔했다.

늘 허리춤에 회중시계를 차고 다닌 미당은 강의를 마칠 때쯤이면 시계를 흘끔 들여다보며 “이만하면 되지 않았나? 오늘은 그만 함세. 맥주나 한 잔 하러 가야겠구먼…”이라 말하곤 했다고.

윤 교수는 “겉으로는 설렁설렁 술이나 드시며 옛날 문인들 이야기나 하는 것 같았지만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솔선수범해 보여줬다. 외적인 유명세에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에 충실했다”고 말했다. 미당에게 들은 ‘당대적 가치에 휘둘리지 말고 영원의 가치를 생각하는 문학을 하라’는 말이 큰 교훈이 됐다고도 했다.

불교 종립대학에서 강의했지만 미당은 학생들에게 영어로 된 성경 읽기를 권했다. ‘세계의 문학과 어깨를 겨룰 줄 알아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영어도 한문도 잘해야 한다는 게 미당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미당 스스로는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비롯해 종교·민속에 관한 책들을 광범위하게 읽어 종교 편향을 넘어서려 했다.

미당은 제자들의 과제물이나 성적표 따위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윤 교수는 “정년 후인 당시에도 자택에 제자들의 성적 기록표, 대학원 학생들 과제물을 보관하고 있었다”며 “돌아가실 때까지 버리지 않아 전북 고창의 미당시문학관, 동국대 도서관 등에 기증해 잘 보존돼 있다. 그런 걸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 시도 강의도 따뜻했던 박목월

최근까지 한양대 에리카(안산)부총장으로 캠퍼스 운영을 총괄했던 희끗한 머리의 박상천 교수(문화콘텐츠학과)지만 ‘목월 선생님’ 얘기에 금세 스물 대학생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1975년 입학해 첫 강의가 문학개론이었어요. 그때 목월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제가 맨 앞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들었죠. 언어란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제 손을 덥석 잡는 겁니다. ‘이건 손이다, 그리고 내 손도 손이다. 둘 다 손으로 불리는데 다르지 않느냐’ 이러셨어요.”

그가 회상하는 목월은 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어려운 이론적 개념도 쉽게 풀어 설명할 줄 아는 선생이었다. 학생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고 했다.

박 교수는 “문학이론을 아주 쉽게 설명했다. 방법론적으로는 예시를 많이 들고 항상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스타일이었다”며 “학생 대답을 듣고 설명을 추가하면서 귀에 쏙쏙 들어오도록 정리해줬다. 학생이 재미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업을 한 셈”이라고 말했다.

유명 인사였지만 제자들과 거리를 두지 않았다. 그는 “수업 시간의 목월 선생님은 항상 웃는 표정이었다. 교수가 되고서 선생님을 닮으려고 한 부분이 그런 부드러운 인상, 늘 학생들에게 미소를 잃지 않고 쉽게 가르치는 점이었다”고 전했다.

목월의 시와 강의는 많이 닮았다는 게 박 교수의 생각. 그는 “평소 시에 나타난 서정성이나 따뜻한 시선이 강의에서도 이어졌다”면서 “수업 끝나고 선생님을 따라가 질문하면 바삐 걸어가는 중에도 친절히 답해주시던 기억이 난다”고 덧붙였다.

◆ 엄격한 자기절제의 미덕 황순원

황순원문학촌장을 맡고 있는 김종회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스승 황순원을 오롯이 겪은 인물이다. 대학 신입생으로 만나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오랜 기간 사제 관계였다. 그는 황순원 문학 연구자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스승을 평생 엄중한 자기절제로 일관한 외유내강의 인물로 표현했다. 그는 “당신의 삶과 인품이 작품에 거의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였다. 작가와 작품이 조화롭게 악수한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황순원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작품 활동하는 동안 본업인 소설 외의 잡문을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자신의 원칙을 지켰다고 제자는 기억했다. 그만큼 황순원은 스스로에 엄격했다.

김 교수는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개별 지식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작가로서의 모습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며 교육하는 쪽이었다”며 “이같이 인품과 작품이 조화롭게 결합하는 과정을 보고 배웠기 때문에 문하에서 많은 문인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황순원은 자기 자신과 작품엔 엄했지만 다른 사람, 특히 제자들에겐 열려있었다. “나는 작가로서 평론가나 연구자들 질문에 답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나, 김군이 질문했으니 대답하도록 하지.” 석사논문을 심사받던 김 교수가 장편 ‘일월’의 내용에 대해 질문했을 때의 에피소드다.

김 교수는 또 “한결같이 부드러우면서도 절제하는 삶을 살았기에 ‘소나기’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고 평했다. 사실 ‘소나기’는 전쟁 중인 1953년 발표됐다. 황순원 특유의 외유내강 품성이 험악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탄탄한 언어로 서정적 작품을 빚어내는 버팀목이 됐다는 분석이다.

그는 “괴테는 80대까지 살면서 서구사회 변동 전체를 연대기적 작품으로 담아냈다”면서 “선생님도 약 60여년에 걸쳐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했다. 문학사에 굉장히 소중한 존재”라고 말했다. 이어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전후 시기까지 격동의 세월을 작품들에서 통시적(通時的)으로 다뤘다. 황순원 소설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내면을 읽을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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