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 부인과 47년 '다문화' 1세대
인생, 생각대로 되는 것 하나 없어…아집 버리는 게 가족을 지키는 길
혈연 강조하는 가족이란 말보다 함께 밥먹는 식구가 더 좋아
[ 이미아 기자 ]
“할아부찌, 물 드쩨요.”
“아이고, 고마워라. 식사 맛있게 했어?”
최근 인천 강화군 온수리에 있는 장애인 직업재활시설 ‘우리마을’에서 만난 김성수 대한성공회 주교(85·세례명 시몬)는 시설에서 지내는 장애인 직원들과 너무나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1987년 6월10일 ‘4·13호헌 철폐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고, 1990년 대주교에 오르고, 2000년부터 8년간 성공회대 총장을 지낸 인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탈했다.
김 주교와 47년째 해로해 온 영국인 부인 김후리다 여사도 함께했다. 1969년 결혼해 슬하에 1남1녀를 뒀다. 성공회 선교사 출신인 후리다 여사는 1983년 국내 최초로 장난감 도서관을 설립했다. 또 국제사회에 유아기 놀이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세계 놀이의 날(5월28일)’을 제안, 이와 관련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우리마을’에선 김 주교를 모두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는 “피붙이를 칭하는 말 중에 가족(家族)도 있고, 식구(食口)도 있는데 나는 식구란 말을 더 좋아한다”며 “같은 곳에서 함께 밥 먹으면 가족이란 뜻이니 혈연만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여기 사는 모두가 내 식구”라며 “지적장애인을 위한 양로원을 만드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강조했다. 김 주교가 2000년 설립한 우리마을에선 60세 정년이 될 때까지 지적장애인들이 콩나물 생산과 부품조립 등의 일을 하며 생활한다.
김 주교는 자신이 ‘현대사의 상징’, ‘종교계의 큰어른’ 등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개뿔만도 못한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는 “한 번도 내 생각대로 살아본 적도 없고, 투철한 사명감도 없었다”며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스님 같은 분들이 진짜 존경받아야지 나 같은 늙은이는 그저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일 뿐”이라고 겸손히 말했다.
사제의 길로 들어선 결정적 계기는 19세부터 10년간 앓았던 폐결핵이었다. 폐결핵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는 그에게 “얼마 못 살 것”이라고 했다. 그러다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다. 단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경기 수원시의 작은 회사에 다녔다. 회사 근처에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베드로고아원에 방을 하나 얻어 출퇴근했다. 고아원 아이들과 놀아주는 그를 보며 고아원에서 밥해 주는 아주머니들이 “사제가 돼 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다. 그렇게 신학 공부를 시작하고 1964년 34세에 성공회 사제서품을 받았다.
후리다 여사는 능숙한 한국어로 “강렬히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었지만 서로 생각이 잘 통했다”며 “근사한 프러포즈 한 번 못 받아봤지만 50년 가까이 투닥투닥 지내왔다”며 웃었다. 또 “한국에선 아이들을 아기 때부터 너무 갑갑하게 기르는 것 같다”며 “어린 시절 제대로 놀 수 있어야 나중에 오감과 창의력이 발달한다”고 강조했다.
김 주교는 “다문화가정이란 말엔 ‘우리’와 ‘너희’를 가르는 편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 별로 안 좋아한다”며 “부부 간 문제의 원인이 무조건 인종과 문화권 차이에만 있다고 몰아붙일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또 “가족을 지키려면 나만의 고집을 버리고 인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주교는 “정작 난 우리집에서 0점짜리 못난 아버지”였다고 고백했다. “평일엔 신자들 돌보고, 다른 집 아버지들이 쉬는 날인 일요일엔 미사 보느라 제일 바빴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또 “아들이 중·고등학교 때 싸움꾼으로 유명해서 교무실에 몇 번 불려가 교사에게 그저 연신 고개 숙이며 ‘죄송하다’고 했다”고 말했다. 또 “그렇게 살다 보니 현실적으로 배우고 깨닫는 게 많았다”고 덧붙였다.
김 주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게 이상적인지 결정하는 건 사람의 몫이 아닌 신의 영역”이라며 “특정 기준을 정하고 거기에만 맞추려 고집을 부리면 자신과 가족 모두 불행해지니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화=이미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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