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세계최대 전자기업
전구 만드는 회사에서 출발…라디오·TV 등 전자회사 명성
삼성·소니 등 亞 기업에 밀리자 반도체 사업 등 과감히 정리
더이상 전자업체 아니다
매년 7% 이상 R&D 투자…빠른 의사결정이 혁신 도와
신성장 분야에 발빠르게 대응…의료기·소비자 가전 중심 재편
[ 나수지 기자 ]
기업에는 수명이 있다. 창업 이후 다른 기업에 합병되거나 부도를 맞기 전까지의 기간이다. 불행하게도 대부분 기업의 수명은 길지 않다. 기업정보 사이트 재벌닷컴이 2014년 자산 100억원 이상 국내 기업 3만여개를 조사한 결과 기업의 평균 나이는 16.9년에 불과했다. 글로벌 기업도 다르지 않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2011년 기준 세계 100대 기업의 평균 나이는 30년이었다. 경영 환경의 변화 속에서 오랜기간 기업을 유지하기는 녹록지 않다.
1891년 창업해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는 필립스가 돋보이는 이유다. 올해로 창업 124년을 맞은 필립스의 장수 비결은 핵심 사업부문도 과감히 정리하고 신성장동력에 투자하는 변화와 혁신이다.
전자기업에서 ‘건강기업’으로
필립스는 전구를 만드는 회사로 시작했다. 1963년 카세트 테이프를 처음 발명하는 등 사업영역을 넓혔다. 1990년대까지 필립스는 세계 최대 전자기업 중 하나였다. 라디오 전기면도기 진공청소기 TV까지 다양한 전자제품을 출시하며 소비자의 호응을 얻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반도체·전자 분야 매출이 필립스 전체 매출의 절반을 넘었다. 그러나 필립스가 이 분야에서 계속 경쟁력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다. 반도체와 전자산업 주도권은 삼성 소니 LG 등 아시아 기업으로 넘어갔다. 그 결과 2001년 26억유로(약 3조7600억원)의 적자를 냈다.
필립스는 빠르게 변화를 시도했다. 2006년 반도체사업 부문을 매각하고 TV사업을 분사하며 전자사업 분야를 정리했다. 2008년에는 의료기기, 조명, 소비자가전 사업으로 기업 구조를 재편했다. 여섯 개이던 주력사업에서 반도체, 부품, 정보기술(IT)서비스를 도려낸 결과다. 노년층이 늘고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 분야의 성장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판단이었다.
2013년에는 기업 이름까지 바꿨다. ‘로얄필립스일렉트로닉스’에서 ‘로얄필립스’가 됐다. 한 단어 차이지만 의미는 크다. 필립스 ?더 이상 전자업체가 아니라는 공식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전자사업 부문은 2000년 필립스의 전체 매출 가운데 44%를 차지했지만 2012년에는 24.4%에 그쳤다. 의료기기 부문 매출은 2010년 전체 매출의 약 34%에서 2012년 40%를 넘어 지난해에는 44.2%까지 성장했다. 2013년 기준 의료기기 부문에서 150억유로(약 20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지난해 9월에는 한 번 더 사업 부문을 조정했다. 조명사업 부문을 조명솔루션 독립 법인 형태로 분리하겠다고 발표했다. 시장에서 선두를 지키고 있는 의료기기와 소비자가전을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개편한 것이다. 건강을 위한 제품을 생산하는 ‘건강기업’ 이미지를 강화하겠다는 포석이다. 프란스 반하우튼 필립스 최고경영자(CEO)는 “기술혁신의 속도가 너무 빨라 한 개 회사가 모든 영역을 개척하는 것은 어렵다”고 필립스의 변화를 설명했다.
대규모 R&D 투자, 빠른 결정하는 문화
대규모 연구개발 투자는 필립스가 뼈를 깎는 변신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필립스는 매년 매출에서 7% 이상을 연구개발(R&D)에 투자한다. 세계 상위 2000개 기업의 평균 매출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중(3.2%)의 두 배가 넘는다. 특히 의료기기 부문 연구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2014년 기준 전체 연구개발 투자액 중 의료기기부문 비중은 65% 수준이었다. 주력 분야를 버리고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면서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다.
꾸준한 연구개발 투자는 기업의 자산이 됐다. 필립스는 2014년 기준 약 7만1000개의 특허를 갖고 있다. 지난해에만 1680건의 특허를 등록했다. 특허받은 기술로 탄생한 신제품은 달라진 필립스를 소비자에게 각인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 필립스가 최근 선보인 기름이 필요 없는 저지방 튀김기 에어프라이어가 대표적이다.
빠른 의사결정을 내리려는 기업문화도 필립스의 혁신을 돕고 있다. 구성원들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기업 혁신은 성공할 수 없다. 반하우튼 CEO는 2011년 필립스의 기업문화로 ‘액셀러레이트(accelerate)’를 선포했다. 보고 체계 단계를 줄이고 허례허식에 낭비하는 회의 문화를 바꿨다. 지난해에는 ‘이달의 기업가 상’을 신설해 각자 분야에서 혁신을 이룬 직원들을 독려하고 있다.
필립스의 변화는 외부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해 “소니 경영진이 오랜 라이벌이던 필립스를 개혁 모델로 삼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적 부진에 시달렸던 소니가 신성장동력 발굴에 성공한 필립스를 참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경영전문잡지 패스트컴퍼니는 필립스를 ‘2014년 50대 혁신기업’으로 꼽았다. 구글 애플 등 변화가 빠른 IT 기업이 주로 오르는 순위다.
필립스는 앞으로도 의료기기 분야에 집중할 계획이다. 베른트 라우단 필립스 독일시장관리 총괄 이사는 지난 4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가전박람회(IFA)에서 “60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00년 11%에서 2050년 22%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필립스는 개인용 허리통증 치료기 등 개인 의료기기 분야에서 사업 기회를 찾고 있다”고 밝혔다.
나수지 기자 suj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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