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란 기자 ] 정부는 2008년 이례적으로 증권사 8곳에 무더기 인가를 내줬다. 자본시장법 시행(2009년 2월)을 앞두고 시장을 키우기 위해서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정부의 이 같은 조치는 증권사 대형화와 통폐합을 유도하기 위한 자본시장법의 방향과 맞지 않다는 지적이 많았다. 결국 차별화 없이 출혈 경쟁에 가담한 대부분 신생 증권사들이 줄줄이 경영난에 허덕이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당시 새로 인가를 받은 증권사는 LIG·KTB·IBK·토러스·애플·바로투자증권과 비오에스·한국스탠다드차타드증권이다. 이 가운데 비오에스증권과 토러스투자증권, 한국스탠다드차타드증권은 자본잠식 상태에 빠졌다. 자본잠식은 회사의 적자폭이 커져 잉여금이 바닥나면서 납입자본금이 자본총계(자본금+잉여금+결손금)보다 많은 상태를 말한다. 비오에스증권은 지난 3월 말 기준 자본금이 자본총계보다 212억원 많은 상태로 자본잠식률이 75%에 이른다. 토러스투자증권과 한국스탠다드차타드증권의 자본잠식률은 각각 17%, 3%다.
애플투자증권은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지난해 스스로 폐업했다. KTB투자증권과 LIG투자증권은 영업이익이 줄면서 2013~2014년 연속 순적자를 기록했다. 그나마 IBK투자증권은 2013년부터 실적이 개선되면서 자본잠식 상태에서 벗어났다. 바로투자증권은 창립 이후 이듬해까지 적자를 기록하다가 2011년부터 흑자 전환했다.
창립 시기가 글로벌 금융위기와 맞물린 탓도 있다. 코스피지수가 한때 1000선 밑으로 폭락하면서 개업과 동시에 자본잠식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금융당국은 인위적 구조조정에는 개입할 수 없다는 태도다. 인수합병(M&A)을 통해 자기자본이 500억~1500억원 이상 증가하는 증권사에 대해 헤지펀드 운용업을 허용하는 ‘당근책’을 내놓은 게 전부다. 하지만 증권사의 자발적인 M&A는 먼 얘기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아무리 작은 증권사라도 채권 매매나 선물옵션 등 파생매매를 통해 어느 정도 이익을 낼 수 있기 때문에 매물로 나오는 회사가 없다”고 말했다.
길재욱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기본적으로 한국은 증권사 수가 너무 많다”며 “자율경쟁과 자연스러운 합종연횡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구축해야 하지만 현실은 딴판”이라고 꼬집었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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