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콜트 권총

입력 2015-06-16 20:35   수정 2015-06-17 05:43

서부개척이 한창이던 1840년대 미국 군인들은 인디언들을 좀체 이기지 못했다. 총이 있었지만 기마전에서 번번이 패배했다. 인디언은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쏴 공격했다. 그런데 머스킷총은 쏘고 나서 재장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텍사스의 기마부대인 텍사스 레인저스는 1845년 어느 날 큰 보물을 얻었다. 탄환 6발을 계속 쏠 수 있는 ‘리볼버’(탄창회전식 다연발 권총)였다. 말을 타고 달리며 총을 연발로 쏘게 되자 전쟁의 판도가 바뀌었다.

이 권총을 개발한 사람이 새뮤얼 콜트(1814~1862)다. 콜트는 선원으로 일할 때 배의 엔진기관에서 탄창회전식 권총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1836년 22세 때 회사를 세워 리볼버를 내놨지만 사람들의 오랜 습관을 바꾸기 어려웠다. 판매는 부진했고 결국 그의 첫 회사는 도산했다. 그런데 텍사스 레인저스 등이 콜트의 권총으로 승리를 거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새로운 기회가 왔다. 1847년 미국 군수부는 콜트에게 권총 1000자루를 주문했다. 콜트는 남의 공장을 빌려 권총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851년엔 영국에도 공장을 세웠고 각종 국제무역전시회를 휩쓸었다. 콜트는 니콜라스 1세 러시아 황제 등에게 공식적으로 콜트 권총을 선물하며 국제적 마케팅에도 수완을 보였다. 1856년께 미국 10대 부자 반열에 올랐다.

1861년 발발한 남북전쟁은 또 다른 기회였다. 원래 남부지역에도 총을 팔았던 콜트는 전쟁이 터지자 북군에만 공급했다. 공장은 생산량을 못 댈 정도로 바빴다. 그해 직원 1000명을 넘었고 이익은 25만달러에 달했다. 콜트는 그러나 건강악화로 1862년 초 사망했다. 그가 생전 생산한 총은 40만정, 모은 재산은 1500만달러나 됐다.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남북전쟁 당시 이런 말이 나돌았다. “링컨은 사람을 해방시켰고, 콜트는 그들을 평등하게 만들었다.” 총이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정작 콜트는 이 말을 못 들었다고 한다.

콜트사는 이후에도 기술과 디자인을 발전시키며 세계적 총기회사로서 영향력을 키웠다. 1873년에 나온 콜트의 ‘피스메이커’는 당시 서부를 휩쓸었다. 또 ‘45구경 권총’으로도 알려진 ‘콜트45’는 미군 장교들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남자 대부분이 쏴본 ‘M16’은 베트남전쟁에서 주력 화기로 쓰였다.

콜트사가 경영난으로 파산보호를 신청했다는 소식이다. 국방비가 삭감되면서 계약이 일부 취소된 탓이 크다고 한다. 총의 시대가 쇠락하는 느낌이 든다.

권영설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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