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사회적 경제'란 미몽(迷夢)에서 깨어나라

입력 2015-06-18 20:37  

"사회적 기업이나 돕겠다는 정치권
시장 왜곡해 좀비기업만 양산할 뿐
경제활성화법 먼저 통과시켜야"

권태신 <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



최근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이 노동당에 압승을 거뒀다. 흥미로운 점은 양당의 공약이었다. 보수당은 재정적자 축소와 법인세 인하를 들고나왔다. 노동당은 ‘부자증세’와 ‘서민감세’를 내세웠다. 영국 국민의 선택은 ‘우(右)클릭’이었다.

2000년대 초반 독일. 진보와 평등을 강조하는 사민당은 유연한 노동시장을 표방하는 강도 높은 구조개혁을 단행했다. 일명 ‘하르츠개혁’이었다. 이를 통해 실업급여 등 복지혜택을 줄여 국민들이 직업을 찾게 유도했고, 비정규직 사용을 유연하게 만들었다. 소위 진보세력이 우클릭을 감행한 셈이었다. 당시 사민당을 이끌던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고비용·저효율로 압축되는 ‘독일병’을 고치려면 사회구조 개혁밖에 없다며 노동개혁을 단행했다.

지금 한국에서는 정반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여야가 경쟁적으로 발의한 ‘사회적 경제 기본법’에 대한 이야기다. 이 법은 마을기업,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을 사회적 경제 조직으로 규정하고, 정부가 이들 조직을 육성·지원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정부·지방자치단체 출연금과 민간 기부금 등으로 사회적 경제발전 기금을 조성하고, 이 기금으로 정부와 공공기관이 총 구매액의 5%를 사회적 경제조직에서 우선 구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당의 원내대표는 이 법안을 두고 ‘사회적 경제는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진화한 형태’라고 했다. ‘따뜻한 시장경제’를 표방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제는 뜨거운 가슴으로 하는 게 아니다. 냉철한 머리로 노력해도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은 게 우리 경제의 현실이다. 또 정부가 사회적 기업 지원이란 미명 아래 자원을 통제하고 배분하는 사회주의적 발상도 이 법엔 숨어 있다. 기업은 국내외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서 수익을 내 그 돈으로 세금을 내고, 정부는 이렇게 쌓은 재원으로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각자의 기본 역할이다.

선한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는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처럼 사회적 기업 등에 대한 지원은 이들과 같은 제품을 생산하는 견실한 중소업체만 시장에서 퇴출시킬 우려가 크다. 지원금으로 연명하는 ‘좀비기업’만 양산해 더 큰 화근을 키우게 될 수도 있다. 비슷한 사례가 있다. 2001년 정부는 ‘중소기업 3만개 IT(정보기술)화 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예산 739억원을 투입해 기초정보소프트웨어업체에 회계·인사 분야를 관리하는 전사적 자원관리(ERP) 시스템 등을 깔아주는 사업이었다. 이 정책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결과만 낳았다. 시스템 업체들이 지원 대상 기업에 리베이트를 주는 방식으로 질 낮은 프로그램을 공급했던 거다. 결국 견실한 프로그램 업체는 판매처를 잃고 시장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회적 경제 기본법도 마찬가지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기업은 나랏돈으로 연명할 테고, 경쟁력 있는 기존 영세업체는 피해를 볼 것이다.

최근 우리 경제가 어렵다. 0%대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사실상 디플레이션에 진입한 모양새다. 더욱이 청년실업자 45만명 시대다. 청년실업률은 10.2%, 공식 실업률에 잡히지 않은 실업자까지 더하면 20%가 넘는다. 국민은 경제살리기에 대한 기대가 크다. 노동시장 구조개혁 등 경제 체질개선이 시급하다는 요구가 거세지만 출구가 보이질 않는다. 서비스업발전기본법 등 약 66만개로 추산되는 일자리를 만들어낼 소위 ‘경제활성화법안’은 국회에서 동면에 들어간 지 오래다. ‘사회적 경제’라는 듣기에만 좋은 명분에 빠져 정작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바라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권태신 <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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