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크 등 포함 21차례 열려
31명에게 대학원 장학금 지원
'계층 상승 사다리' 기회 제공
[ 박상용 기자 ]
“나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저씨를 쳐다봤다. 구릿빛 얼굴, 기운 없는 두 눈, 이마에 잡힌 주름에 삶의 무게가 가득했다. 마른 팔에 핏줄이 드러나고 손에는 상처가 있었다. 찌든 땀 냄새도 났다. 아저씨는 틀림없이 농민공(농촌 출신 도시근로자)이었다.”
성균관대가 지난 15일 중국 베이징에 있는 한 호텔에서 연 ‘제9회 중국 성균한글백일장’에서 1등을 차지한 장푸 씨(22)의 글 일부 내용이다. 장씨는 베이징대에 재학 중이다. 중국 성균관백일장은 중국 대학생들이 한글 작문 실력을 겨루는 자리다. 심사위원으로 나선 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장씨의 글에 대해 “한국 대학생 수준의 글”이라고 감탄했다. 다른 교수들도 “한국 학생도 이 정도 글을 쓰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장씨는 대학교 1학년 때 고향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난 행색이 초라한 인물에 대한 묘사로 글을 시작했다. 겉모습만 보고 농민공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장씨와 같은 고향 출신으로 광물연구소 직원이었다. 성(省) 수석으로 베이징대에 입학해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원하던 경영학과에 진학하지 못해 방황하던 장씨는 이때 만난 인물처럼 당장은 힘들더라도 좀 더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으로 글을 맺었다.
성균관대는 2007년부터 중국 내 대학의 한국어학과 재학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열고 있다. 1~3등 입상자에게는 성균관대 석사과정 전액 장학금을 지원한다. 중국에서 열린 백일장이 큰 인기를 끌면서 개최 국가가 유럽과 베트남 등 5개국으로 늘어났다. 이날 행사에는 중국 내 52개 대학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학생 87명이 참가했다. 대부분은 전날 2~8시간 동안 열차나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와 하루 묵으며 백일장을 준비했다.
백일장 글제로 ‘길잡이’라는 단어가 공개되자 학생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자어 어휘에는 강하지만 순수 한국어에는 약해 단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참가자도 있었다. 대회 위원장인 성재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일상적인 단어를 피해 글제를 선정했다”며 “길잡이란 방향을 제시하고 나의 인생을 이끌어준 사람”이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심사에 참여한 교수 4명은 4시간가량 열띤 논의 끝에 장씨의 글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장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한국어를 잘 하는 친구가 많아 수상을 기대하지 못했다”고 기뻐했다. 장씨는 졸업 전 취업에 성공해 다음달부터 삼성물산 한국 본사로 출근한다. 은상은 ‘내 인생의 길잡이, 어머니’라는 주제로 글을 쓴 헤이룽장대의 장치 씨(22)에게 돌아갔다. 학교 대표로 뽑히지 못한 장씨는 자비를 들여 대회에 참가해 입상했다. 장씨는 “부모님에게 부담주지 않으려고 학비가 저렴한 중국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이었는데 이번 수상으로 학비가 해결돼 한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됐다”며 “언어학을 전공해 교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처럼 성균한글백일장을 통해 얻은 한국 유학 기회가 더 나은 삶을 위한 밑거름이 된 사례는 많다. 21차례 열린 대회에서 65명이 입상했으며 이 중 31명이 성균관대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2009년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금상을 탄 아이다로바 아이게름 씨(27)는 정치외교학 석사학위를 딴 뒤 고국으로 돌아가 외교관이 돼 지난해 한·카자흐스탄 정상회담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통역을 담당했다. 2007년 1회 중국백일장에서 은상을 받은 뤄위안 씨는 무역학 석사학위를 딴 뒤 중국삼성전자에 다니고 있다. 2회 동상을 받은 장쥐안메이 씨도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고 아모레퍼시픽 상하이지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 학생들이 학부를 졸업하고 기업에 취직해 받는 평균 임금 월 50만~70만원보다 많은 월급을 받고 있다.
이석규 성균관대 국제처장은 “글제가 어려워 걱정했는데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시험지를 빼곡히 채웠다”며 “해가 지날수록 대회에 참가하는 중국 학생들의 한국어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박상용 기자 yourpenci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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