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 이삭이 새겨진 이 주화는 미국 돈으로 139달러(약 15만4000원) 정도다. 보리 문양의 우리나라 50원짜리 동전 3080개 가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주화는 순금으로 이뤄졌다. 구리와 니켈, 심지어 면(綿)으로 만들어진 오늘날의 화폐와는 급이 다르다.
수니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의 주화 ‘이슬라믹 디나르(Islamic Dinar)’ 얘기다. 최근 시리아에 등장했다는 이 주화의 사진은 한동안 트위터를 달궜다. 영국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IS는 금·은·동으로 이뤄진 주화 7종을 최근 발행하기 시작했다. 7세기 초기 이슬람 시대에 통용되던 금화와 은화를 본뜬 것이라고 한다. 초기 이슬람 사회를 이상향으로 삼는 IS엔 화폐 역시 과거로 되돌릴 대상이다. 화폐 발행의 의미는 적지 않다. IS가 단순한 무장단체를 넘어 하나의 국가를 지향한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이미 IS는 작년 6월 아부 알바그다디를 칼리프(이슬람공동체 최고통치자)로 하는 국가를 수립한다고 선포했다.
IS는 화폐라는 경제 권력까지 손에 쥐게 될까. 이슬라믹 디나르가 진정한 ‘돈’이 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경제학 교과서는 돈의 필수 기능을 세 가지로 꼽는다. 우선 교환을 편리하게 매개한다. 상품 가치의 척도 역할을 하는 한편, 훗날에도 물건을 교환할 수 있게 가치를 저장한다.
이슬라믹 디나르가 돈 역할을 하려면 수요가 있어야 한다. 경제 예측으로 유명한 미래학자인 제럴드 셀런트는 최근 언론을 통해 “누가 이를 거래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대부분의 국가는 극단적인 테러조직인 IS의 화폐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지하경제의 수요도 한계가 있다.
화폐 공급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한 지역의 경제가 돌아가면 더 많은 화폐를 찍어야 한다. 게다가 금·은화다. 전문가들은 IS가 찍어내는 금화도 ‘훔친 금’일 것으로 추정한다. 외국인 인질거래 등 지하경제 없이는 IS가 금을 구하기 어렵다.
결국 신용의 문제다. 사람들이 한낱 면 조각에 불과한 5만원권을 고이 모아 금고에 보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은행법은 ‘한국은행권은 모든 거래에 무제한 통용된다(제48조)’고 규정한다. 한은은 시중 유동성을 조절해 돈의 가치를 최대한 보전하고자 한다. 화폐를 남발하거나 너무 적게 발행한다면 사람들이 그 화폐를 외면할 것이다.
박정우 삼성증권 연구원은 “이슬라믹 디나르는 북한 등 폐쇄 국가에서 발행한 돈과 비슷한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발행한 원화는 북한 내에서도 중국 위안화에 밀려 외면당하고 있다. 극심한 수요 부족 탓에 북한 돈의 가치는 크게 떨어졌다. 공식적인 환율과 실제 환율이 딴판인 이유다.
네티즌의 관심사는 조금 다른 듯하다. 관련 뉴스가 올라온 유튜브 게시판엔 ‘아무리 그래도 금화 아니냐’는 반응이 많다. 금으로 이뤄졌으니 어느 정도 가치는 보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가치가 폭락한 러시아 루블화보다는 낫다’는 우스개 섞인 의견도 보인다.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금화의 가치가 실제 금의 가치보다 떨어질 경우다. 이땐 금화를 녹여 파는 것이 낫다. 과거 10원짜리 동전의 원가가 액면가보다 높았을 때도 그랬다. 화폐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짐 로저스 같은 투자의 귀재들은 색다른 시각으로 접근할지도 모른다. 그는 향후 통일에 대비해 북한 화폐에 투자할 것을 조언한 적이 있다. 일부 네티즌은 이슬라믹 디나르가 희귀한 수집품이 될 가능성도 제기한다. 금으로 만들어진 기념주화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테러리스트들이 만든 ‘피의 금화’가 그땐 진짜 돈 냄새를 풍길지도 모른다. 돈의 세계가 보여주는 비정한 역설이다.
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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