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미 기자 ] ‘욕실에 고무대야가 있어서 물을 받아 쓴다. 다 씻고 나면 거실의 식구에게 속옷을 던져달라고 한다(샤워가운이 없다). 양변기 수조에 벽돌이 들어 있다. 수박 먹고 빨간 부분이 남으면 혼난다.’
고개를 끄덕였다면 ‘가난한 사람’(주석 참조)이다. 일부 네티즌에 따르면 그렇다는 얘기다. 최근 인터넷 익명게시판에 잇달아 올라온 가난한 집의 특징 몇 가지다. 인터넷 유머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가난 시리즈는 젊은 층이 드나드는 익명 사이트에서 우스개처럼 시작됐다. 세세한 주거 방식이나 습관을 잘 포착할수록 댓글의 호응이 높다. 삼선짜장을 못 시켜본 사람은 가난하다는 식의 ‘생활의 발견’이 핵심이다.
여러 변형도 볼 수 있다. 자기 집 부엌이나 화장실 사진 등을 올려 가난해 보인다는 반응을 유도한다. 소위 ‘가난한 집 인증’이다. 아예 집 평수나 자산 수준을 공개한 뒤 우리집은 어느 정도인지 묻기도 한다. 자산이 100억원 이상이면 ‘금수저’이고 50억원 이상이면 ‘은수저’, 자녀가 대학에 갈 때 차를 사주는 집안은 ‘동수저’라는 친절한 답변이 이어진다. 이도 저도 안 되면 ‘흙수저’, 비싼 숟가락을 물고 태어난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라도 자신의 경제적 위치를 확인하려고 할까. 엄밀하게는 내가 아니라 부모의 위치다. 가난 인증 글의 다수는 여러 푸념으로 이어진다. 넉넉한 집안의 또래와 비교해 취업과 결혼, 연애까지 불리하다는 호소다. 인터넷은 이 같은 ‘찌질한’ 얘기를 그나마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다.
금수저 흙수저라는 단어가 인터넷을 달군 배경과도 맞물린다. 최근 TV 요리프로그램에서 한 젊은 요리사는 금수저로 알려진 뒤 집중 포화를 받았다. 요리 실력은 부족한데 집안이 부유해 성공한 것 아니냐는 비난이었다. 결국 그 셰프의 가족이 ‘우리는 금수저가 아니다’고 해명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경제학자들에게 이는 계층 간 이동의 문제다. 부의 집중은 세계적인 골칫거리이기도 하다. 소득 격차가 벌어지고 계층 간 이동이 막히면 불만이 커진다. 한국의 소득분배지표는 외환위기 이후 빠른 속도로 악화됐다. 최상위 20%의 소득 평균을 최하위 20% 소득으로 나눈 5분위 배율(가처분소득 기준)은 1992년 3.52배였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급등해 2009년엔 4.97배에 달했다. 대량 해고와 자영업 실패로 중산층이 무너진 탓이다.
5분위 배율은 지난해 4.42배로 낮아졌지만 외환위기 이전 수준은 아직 멀었다. 자신감을 잃은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를 실제보다 더 아래로 여긴다.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까지 서민 또는 빈곤층이라 생각한다. 한 ㎢?중산층의 덕목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가난의 증거로 희화화한다. 양변기 물을 아끼고 수박을 알뜰하게 먹는 것 등이다.
윤희숙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이를 터널효과로 풀이했다. 편도 2차로 터널 안에서 함께 멈춰서 있던 옆 차가 움직이면 불만이 더 커진다. 외환위기 이후 특정 직종이나 자산가들의 소득이 더 빠르게 늘면서 박탈감이 커졌다는 설명이다. 요즘 젊은 층의 ‘가난 공감’은 그 또 다른 버전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삼선짜장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날이 와야 할 텐데.
■ 주석
인터넷에선 ‘가난충’이란 신조어가 쓰이고 있다. 가난한 사람을 벌레(蟲)에 비유한 단어로 추정된다. 국립국어원에선 가난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가난뱅이’를 대신 추천한다. 가난한 사람을 벌레에 빗대는 것이 새롭지는 않다. 이경규의 학창시절 별명이 빈대였다고 한다. 그는 지금 최정상 개그맨이다.
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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