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원짜리 프라이팬에 5배 비싼 버터 사도 "하나도 안 아까워"
회사선 '질투유발자'
야유회서 셰프 변신…여직원들 하트 '뿅뿅', 남동료들은 레이저 눈빛
[ 오동혁 기자 ]
‘요리하는 남자’가 대세다. TV에선 최현석, 이연복, 레이먼킴 등 유명 셰프들이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인터넷에는 각종 요리 레시피(조리법)가 검색어 상위권에 오른다.
대표적인 게 유명 프랜차이즈 최고경영자(CEO)이자 셰프인 백종원 씨의 레시피다. 김치찌개 등 집에서 손쉽게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의 맛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그의 레시피는 TV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요리 프로그램과 셰프들이 인기를 끌면서 ‘요섹남(요리 잘하는 섹시한 남자)’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이 같은 요리 열풍은 직장인의 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비싼 식재료·장비도 ‘통 크게’ 구입
한 백화점 홍보팀에 근무하는 신 대리(33)가 처음 요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업무 때문이었다.
지난해 식품관 홍보를 맡은 게 계기가 됐다. 식품관에서 판매하는 식재료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요리를 배워보기로 했다. 그는 백화점 문화센터 주말반에 등록한 뒤 만든 음식 사진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꼬박꼬박 올렸다. 사진을 올릴 때마다 “맛있겠다” “대단하다” 등의 댓글이 올라왔다. 처음엔 업무 때문에 시작한 요리의 매력에 시간이 갈수록 빠져들었다.
그는 올 들어 요리에 시간, 정성, 돈을 더 많이 투자하고 있다. 최근에는 프랑스 브랜드 ‘드부이에’ 프라이팬을 통 크게 장만했다. 개당 10만원이 훌쩍 넘는 고급 프라이팬을 종류별로 5개 구입했다. “디테일에 신경 써야 제대로 된 맛을 낼 수 있다”며 일반 버터보다 다섯 배 비싼 ‘에쉬레’만 고집하고 있다. 프랑스 루아르 계곡의 한 낙농장에서만 소량 생산한다는 제품이다. 그의 냉장고는 안심, 등심 등 다양한 소고기 부위로 가득 차 있다.
“요리는 공부하면 할수록 새로운 세계가 열리더라고요. 요즘은 식재료나 장비를 살 때 전혀 돈이 아깝지 않습니다.” 식품회사에 다니는 최 팀장(43)은 요즘 요리 덕분에 아들과 부쩍 친해졌다.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 마땅한 대화 주제가 없어 서먹서먹해지고 있던 터였다. 아들과 대화를 많이 하기 위해 큰 맘 먹고 신청한 ‘자녀와 함께하는 요리클래스’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들과 함께 만든 첫 번째 메뉴는 연어덮밥.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만들어 나가다 보니 어느새 연어덮밥이 뚝딱 만들어졌다. 처음엔 “아빠와 함께 가기 싫다”고 피했던 아들이 요즘은 먼저 “같이 가자”고 말한다.
“요리를 하면 자연스럽게 아들과 얘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요리 실력이 형편없었던 내가 그럴듯한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요. 아들과 함께 만든 요리를 아내에게 들고 가 자랑하는 게 요즘 가장 큰 낙입니다.”
야유회에서 요리 하나로 ‘인기남’ 등극
서울 한 사립대에서 교직원으로 근무하는 홍 계장(34)은 얼마 전 동료들과 야유회를 다녀온 이후 요리 공부에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1년 후배 김 계장의 요리 실력이 그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김 계장은 요즘 유행하는 ‘백종원식 카르보나라’를 선보였는데, 이 요리가 팀원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놀라운 것은 여직원들의 반응이었다. 평소 도도하고 새침해 홍 계장이 말도 붙이기 어려웠던 여직원들이 김 계장에게 “요리는 언제부터 했느냐” “소스도 직접 만드냐” 등 질문을 쏟아낸 것.
홍 계장은 “야유회에서 돌아온 이후 요리 애플리케이션도 깔고 백종원 씨가 나오는 TV 프로그램도 보면서 음식을 따라 만들어 보고 있습니다. 다음 야유회에선 동료들의 관심을 받아 봐야죠.”
광고대행사의 그래픽 디자이너인 박 대리(32)는 최근 팀 워크숍에서 김치찌개 하나로 동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박 대리가 만든 김치찌개를 한술 떠 먹어본 사람들은 곧바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료들은 “어떻게 뻔한 재료로 이렇게 맛있게 끓일 수 있느냐”며 찬사를 보냈다. 특히 자취하는 여직원들이 레시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평소엔 말 한마디 안 해본 동료들과 정말 많은 얘기를 했어요. 김치찌개 하나 만들었을 뿐 琯?hellip;. 기분이 좋더라고요.”
“요리가 제일 큰 스트레스”
게임업체에 근무하는 김 대리(33)는 요즘 요리가 가장 큰 스트레스다. 10년 넘게 자취생활을 하면서도 한 번도 요리해본 적 없는 그가 갑자기 회사에 요리를 해가야 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같은 부서 이 대리가 직장 동료들과 나눠 먹겠다며 직접 만들어 회사에 가져온 떡볶이가 문제였다. ‘이 대리표 떡볶이’는 동료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부서에서 큰 화제가 되자 팀장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요즘 요리하는 남자가 대세라는데 우리도 남자직원들이 돌아가면서 간식거리를 만들어 보는 게 어때?” 그날 이후 회사에는 고구마 맛탕, 옥수수 튀김 등 화려한 간식이 매일같이 등장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파스타 등과 같은 간식의 수준을 넘어서는 식사용 음식들까지 나왔다. 뒷순서를 배정받은 김 대리는 점점 부담감이 커졌다. “어찌됐건 회사에서 시킨 일이니 못하면 안 되잖아요. 묘한 경쟁 심리가 생기더라고요. 유명 셰프들의 레시피를 찾아보면서 집에서 맹연습하고 있는데 ‘요포자(요리포기자)’인 나 같은 사람에게는 여간 스트레스가 아닙니다.”
한 대기업에 다니는 강 과장(34·여)은 요즘 직장 동기가 윗사람들에게 하는 ‘요리 아부’가 너무나도 아니꼽다. 베이커리 학원에 다니는 그의 여자 동기는 매주 목요일 퇴근 후 만든 빵을 금요일마다 가져와 직장 상사들에게 대접한다.
문제는 동기나 후배는 모른 척하고 오로지 상사에게만 직접 구운 빵을 선물한다는 점이다. 이를 먹어본 상사들은 “제빵은 언제 배웠느냐”며 “우리 팀의 보물”이라고 칭찬 일색이다. 불똥은 강 과장에게 튀었다. 몇몇 상사들이 “아니, 강 과장은 이런 거 못 만드나. 요리 잘하게 생겼는데 말이야”라며 비교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승진 시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강 과장은 빵 때문에 동기한테 밀릴까봐 은근히 걱정이다. “요즘 요리 열풍이 불면서 직접 만든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같아요. 집에서도 요리는 손 놓은 지 오래인데, 차별당하지 않으려면 요리학원에라도 등록해야 할 판입니다.”
■ 특별취재팀
송종현 산업부 차장(팀장) 이호기(IT과학부) 강현우(산업부) 오동혁(증권부) 박한신(금융부) 김대훈(정치부) 김인선(지식사회부) 박상익(문화스포츠부) 강진규(생활경제부) 홍선표(건설부동산부) 이현동(중소기업부) 기자
오동혁 기자 otto8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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