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은 세부나 보라카이로 잘 알려졌지만 다른 가볼 만한 곳도 많다. 그중에서도 바나웨는 지금까지 만났던 필리핀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산 하나를 고스란히 깎아 만든 다랑논이 있는 바나웨에는 인간의 손으로 자연과 투쟁한 경이로운 현장이 펼쳐진다. 끝없이 이어지며 물결치는 다랑논의 풍경 앞에서 방문객들은 연신 탄성을 터트릴 수밖에 없다.
해발 2000m 산비탈 깎아 만든 논
수도 마닐라가 있는 루손 섬은 필리핀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는 곳이다.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약 300㎞ 떨어진 바나웨는 인구 3000여명의 작은 마을이다. ‘루손섬의 지붕’이라 불리는 해발 2922m의 코르디예라 산맥 깊숙한 곳에 자리해 가기가 만만치 않다. 포장도 되지 않은 길을 자동차로 10시간을 가야 해서 고역이다.
하지만 여행객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는다. 험준하고 작은 산골마을이 명소가 된 건 ‘라이스 테라스’라고 부르는 계단식 논 때문이다. 코르디예라 산맥의 가파른 산비탈을 깎아 만든 논들이 거대하게 펼쳐져 있는데, 산 하나가 온통 논이다. 도저히 벼농사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가파른 경사를 따라 층층의 논이 끝없이 이어진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를 이해하려면 수치를 봐야 한다. 바나웨를 비롯해 인근 산악 지역의 논둑 길이를 모두 합하면 2만2240㎞로 지구를 반 바퀴 도는 거리다. 넓이는 여의도의 약 47배인 400㎢에 달한다. 필리핀 최고액 지폐인 1000페소 지폐에도 새겨져 있다. 199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런 대역사의 주인공은 이푸가오족이다. 이푸가오는 ‘언덕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2000년 전 코르디예라 산맥에 정착한 이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산등성이를 일궜다. 중국의 한족이 만리장성을 쌓고, 로마가 유럽과 지중해를 누빌 때 이푸가오 족은 해발 2000m 고지대에 계단식 논을 조성했다. 다랑논의 맨 아래가 가장 먼저 만든 것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최근에 만든 것이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유구한 세월이 산기슭에 새겨져 있다.
오직 인간의 힘으로 논을 일구다
무엇보다 그 많은 논을 모두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놀랍다. 워낙 좁고 가파른 산비탈이라 가축의 힘을 빌릴 수도 없어 한 계단 한 계단 손으로 일군 것이다. 삽과 수레바퀴도 없이 나뭇가지, 소뼈를 이용해 흙을 파고 돌을 옮기고 축대를 쌓았다. 폭 1m의 논을 만들기 위해 3m 높이의 돌계단을 쌓아 만든 라이스테라스는 직접 마주하면 기적이라는 말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다랑논은 전부 빗물에 의존해야 하는 천수답이다. 하지만 이푸가오족들은 논 전체에 빗물이 닿을 수 있게 계단 곳곳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빗물을 저장하고, 대나무관으로 만든 배수로를 연결해 논마다 물이 고르게 흘러갈 수 있도록 했다.
이푸가오족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은 단연 쌀이어서 보관에 많은 신경을 썼다. 이푸가오 족 전통 가옥은 3층 구조로 된 목조가옥 ‘발루이’다. 1층에는 돼지나 닭 같은 가축을 키우고 2층은 부엌과 침실을 갖춘 원룸 형식의 주거공간이다. 3층은 쌀을 보관하는 창고다. 2층 부엌에서 밥을 지으면 연기가 3층으로 올라가 쌀을 자연적으로 건조시키기 때문에 썩지 않는다.
산을 논으로 바꾼 이푸가오족은 용맹하기로도 유명하다. 특히 사냥을 잘했는데 지금도 그 풍습이 남아 있어 노인들 머리 위를 원숭이 머리뼈나 도마뱀 머리뼈로 장식한 것을 볼 수 있다. 껌을 씹듯 뭔가를 질겅질겅 씹는 것은 이푸가오 족의 기호품이자 전통약재인 빈랑나무 열매다. 잇몸을 튼튼하게 해주고 충치를 예방한다고 한다. 두개골 장식을 한 노인이 열매 때문에 빨갛게 변한 입술로 씩 하고 웃었다. 어쩐지 무서운 생각도 든다. 하지만 경이적인 그들의 노력은 어떤 붉은색보다 더 붉다.
여행 팁 / 산악 토착민 마을 방문은 반드시 현지 가이드 동행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필리핀항공, 세부퍼시픽항공 등이 인천~마닐라 직항편을 운항한다. 루손섬 북부는 저지대와 산악지대의 기후가 확연히 나뉜다. 저지대는 전형적인 몬순 기후이지만 산악지대는 겨울철 기온이 10도 아래로 떨어진다. 산악지대 토착민들의 마을을 방문할 땐 반드 ?현지인 가이드와 동행해야 한다. 밑창이 튼튼한 운동화는 필수.
바나웨(필리핀)=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ssoocho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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