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박인비의 몰입

입력 2015-08-04 18:03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그 순간 골프의 신이 내 옆으로 왔다. 퍼트 헤드를 볼에 갖다 대기만 하면 다 들어갔다.” 박인비의 신들린 퍼팅 비결은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무덤덤한 돌부처 표정에 느릿느릿한 몸짓, 위기에서나 찬스에서나 흐트러지지 않는 템포, 메트로놈에 맞춘 듯 일정한 페이스와 리듬…. 그 무념무상의 몰입 상태가 커리어 그랜드슬램이란 신화를 쓰게 했다.

이번 대회 14번홀 7m 이글이나 16번홀 역전 버디도 마찬가지다. 주변 풍경이 화면에서 사라지듯 페이드 아웃되고 오로지 혼자만의 경기에 집중하는 몰입의 힘. ‘침묵의 암살자’라는 별명처럼 소리 없이 강한 그의 집중력이 한껏 빛났다. 플레이하는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그는 “특히 메이저 대회 때, 마지막날 집중력이 더 커진다”고 했다.

몰입은 다른 스포츠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홈런 타자가 “야구공이 수박만 하게 보였다”고 하거나 마라톤 선수가 “구름 위를 달리는 듯했다”고 할 때도 그렇다. 학자들은 야구공이 수박만 하게 보이는 순간의 착시 효과를 인지심리 현상으로 설명한다. 미국 심리학자 제시 위트는 실험으로 이를 입증하면서 “골프 홀이 양동이나 농구 링처럼 넓어 보였다”는 사례도 함께 소개했다.

《몰입의 즐거움》을 쓴 칙센트미하이는 스포츠뿐만 아니라 미술, 음악 등 예술 분야에서도 몰입의 기적이 자주 나타난다고 말한다. 막이 오르자마자 ‘순간 몰입’의 경지로 빠져드는 성악가나 연주자들의 표정이 이를 잘 보여준다. 몰입(flow)이란 ‘무언가에 흠뻑 빠져 있는 심리적 상태, 현재 하는 일에 심취한 무아지경의 상태’를 말한다. 주위의 모든 방해물을 차단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몰입하면 몇 시간이 한순간처럼 느껴지는 시간왜곡 현상이 일어나고 몰입의 대상이 더 뚜렷하게 보이며 일체감이 커진다. 몰입 상태에서는 자신의 활동을 완전히 장악하는 통제력도 커진다. 내재적 동기가 강하니 눈앞의 성과에 집착하거나 외부 환경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몰입의 한가운데에서는 ‘물 흐르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과 ‘하늘을 나는 듯 자유로운 느낌’을 경험한다고 한다. 이른바 최적 경험(optimal experience)의 황홀한 순간이다. 27세에 메이저 7승의 대기록을 세운 박인비가 “퍼터만 대면 공이 들어가더라”고 말한 게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물론 아무나 쉽게 몰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랄 때, 연마하고 연마하고 또 연마하는 가운데 몰입의 순간은 문득 다가왔다 사라진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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