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을 외치지 않은 정권이 없지만 박근혜 정부만큼은 아닌 듯하다. 기사통합검색 사이트 카인즈에서 ‘박근혜+개혁’을 키워드로 검색해 보니 3만4953건의 기사가 뜬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 각 5년 임기 중 개혁 언급 횟수가 3만~4만건이었는데 이를 2년 반 만에 넘어설 기세다. 매체 수가 늘어난 이유도 있겠지만 개혁이 일상 언어가 된 결과다.
너나없이 개혁을 말한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노동개혁이 표를 잃는 일이지만 애국하는 마음으로 하겠단다. 황교안 총리는 반부패 개혁을 강조하고,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구조개혁만이 살 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심지어 ‘국해(國害)의원’들도 여야 가리지 않고 개혁을 외친다.
기본으로 돌아가 할일 하는 것
그럴수록 개혁이 뭘 의미하는지 점점 모호하고 아리송해진다. 정치권, 관료, 이익집단마다 속에 담은 뉘앙스가 제각각인 탓이다. 개혁 대상이 돼야 할 사람들까지 개혁을 외친다.
취재원을 만날 때마다 개혁 또는 구조개혁의 의미를 물어봤다. 김인호 한국무역협회장은 “시장경제 원리에서 멀어진 것을 되돌리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영원한 대책반장’으로 불리는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도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요약했다. 쉽게 말해 “하지 말 것은 안 하고 해야 할 것은 하는 것”(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이란 설명이다. 반면 “지나치게 포괄적이어서 사전에 범위와 맥락을 정해놓지 않으면 공허한 얘기가 되기 쉽다”(조동근 명지대 교수)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기본으로 돌아가고, 할 일과 안 할 일 구분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랬다면 2분기 3조원대 영업손실을 낸 대우조선해양 사태도 없었을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고 대형사고는 수많은 사소한 사고 끝에 일어난다.
노동시장 유연화, 서비스업 활성화, 규제 완화 등의 아젠다는 지난 20년간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고 있다. 이유는 명백하다. 개혁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합의가 없고, 의지와 역량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장 시급한 노동개혁도 그 본질은 일자리 선순환에 있다. 하지만 임금이 생산성이 아닌 머리띠와 빨간 조끼로 결정되는 한 청년 일자리 창출은 요원한 얘기다.
기득권과의 전쟁 각오돼 있나
공공·교육·의료가 꽉 막힌 병목이 된 이면에는 강력한 노조가 도사리고 있다. 민간기업 노조 조직률이 9.1%인데 공무원은 63.5%, 교원은 16.8%다. 보건의료 노조(4만3000명)는 어느덧 금속노조, 전교조와 더불어 민주노총 주력이다. 노조 조직률이 높은 부분일수록 일자리 장벽도 높다. 툭하면 노·사·정 대타협 운운하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자신은 개혁할 게 없고 남들만 개혁하라고 하는 순간 개혁 ?헛바퀴를 돈다. 개혁 성공의 전제조건은 자신의 기득권부터 내려놓는 것이다. 공기업·금융 개혁은 낙하산과 관치의 유혹을 포기할 때에야 가능하다. 비정규직, 청년 일자리는 물론 정규직부터 양보해야 실마리가 풀린다.
국민은 금세 개혁 피로증후군에 빠진다. 쓴 약과 식이요법이 몸에 좋다는 건 알아도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또한 개혁이 더뎌질수록 개혁 대상 집단엔 내성이 생긴다. 정부는 연말까지 잡음이 나더라도 개혁의 고삐를 죄겠다고 한다. 두더지처럼 수시로 튀어 오르는 기득권과 일전을 벌일 각오가 돼 있는가. 이젠 개혁에도 개혁이 필요하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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