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까지 네 나라의 국가를 불러야 했다. 영국 일본 말레이시아 국가를 할 수 없이 불렀고, 독립 후에는 우리 싱가포르 국가를 자랑스럽게 부른다. 무경험과 무지 속에서 우리는 열의와 성의로 싱가포르를 일류국가로 키워냈다.”
지난 3월 타계한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는 2000년 출간한 자서전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에서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싱가포르는 세계 경제사에 유례없는 성공사례가 됐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1819년 120여명의 어부가 살고 있던 이 섬에 인도와 중국을 잇는 무역중심지를 구축하기 전까지만 해도 싱가포르는 말레이반도 끝 진흙탕에 불과했다. 1869년 수에즈운하가 개통되면서 교역이 늘기 시작했다. 그나마 1942~45년 일본에 점령당했을 땐 100만 인구의 절반이 떠나기도 했다. 196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말레이시아연방의 구성원이 됐다가 1965년 독립했다.
지난 9일은 싱가포르 건국 50돌이었다. 주변국으로부터 ‘곧 없어질 나라’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싱가포르는 1인당 국민소득 5만6000달러가 넘는 아시아 최고의 ‘부자나라’로 우뚝 섰다.
그러나 새로운 반세기를 시작하는 싱가포르의 앞날이 밝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제까지의 성장모델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어서다. 싱가포르는 말라카해협의 요충에 자리 잡고 있고 태풍이나 지진 같은 천재지변이 거의 없는 지리적 이점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중동의 석유를 중계무역하는 것을 비롯 국제물류 허브로서의 역할이 싱가포르 국부의 원천이었다. 잠재력 큰 중국의 대외무역 창구 역할도 큰 비즈니스였다. 여기다 ‘선한 독재’로 불렸던 리콴유 전 총리가 만든 ‘부패없는 정부’라는 시스템이 이런 경제모델을 뒷받침하는 엔진이 됐다.
문제는 이 성장모델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사실이다. 리콴유 전 총리 타계 이후 예전 같은 정부 리더십이 유지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특히 미국 셰일가스 개발로 촉발된 ‘석유시대의 종언’은 큰 충격파다. 중동 석유시장은 위축될 수밖에 없고 싱가포르의 물류허브 역할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여기다 중국이 독자적으로 세계 시장을 개척하면서 싱가포르가 낄 틈은 점점 작아진다.
생전의 리콴유도 작은 나라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늘 “역사적으로 도시국가들은 오랫동안 살아남기 힘들다”며 “세계 네트워크 속에서 경쟁력을 찾아야 한다”고 했었다. 싱가포르가 어떤 해법을 찾아낼지 주목된다.
권영설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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