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납금 없는 협동조합 회사 설립…'노란 병아리 택시' 전국 달릴 것"
[ 이미아 기자 ] 경험 삼아 했던 택시운전기사
‘노태우 비자금 폭로’로 이름 알려
국회사무총장 올랐던 스타 정치인
1999년 택시기사 경험이 사업계기로
의원님에서 사장님으로 제2인생
전 재산 4억으로 40억 회사 인수 결심
자금 못 구해 명동 사채까지 빌려
“아내, 저 때문에 응급실 두 번 실려갔죠”
앞으로 ‘3부제·3교대’ 근무제 도입
부산 대구 인천 등으로 사업 확장할 것
1970년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재학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4년여간 수배됐다. 1995년 14대 국회 옛 민주당 초선의원 시절 ‘노태우 비자금 4000억원 폭로’로 일약 스타 정치인이 됐다. 1996년 1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낙선한 뒤 “진정한 민심의 소리를 듣겠다”며 1999년부터 약 1년 동안 택시기사 생활을 했다. 2004년 17대 국회에서 옛 한나라당 의원으로 재선했고 국회 사무총장을 했다. 그러다 이번엔 택시회사 이사장이 돼 돌아왔다. 누가 봐도 굴곡 심한 인생의 주인공, 그는 박계동 한국택시협동조합 이사장(63·사진)이다.
서울 상암동에 있는 한국택시협동조합(옛 서기운수) 사무실에서 박 이사장을 만났다. 컨테이너 구조물 한쪽에 오래된 책장과 책상, 소파와 조그만 냉장고만 있는 단출한 공간이었다. 한쪽 벽엔 소속 조합원 명단과 차량 번호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는 “저 이렇게 삽니다”고 말하며 호탕한 웃음과 함께 악수를 청했다.
승차거부 없는 ‘노란 택시의 꿈’
박 이사장은 ‘쿱(Coop)’이란 브랜드명이 적힌 한국택시협동조합의 노란색 택시를 보여 줬다. “노란색이 다 같은 노란색인 줄 알았는데 명도와 채도에 따라서 종류가 140여개나 된다고 해요. 우리 차의 노란색 이름은 옐로 본(Yellow Born)입니다. 갓 태어난 병아리의 털 색깔을 표현한 것이죠. 이 색처럼 밝고 새로운 택시문화를 이뤄가자는 게 목표예요.”
지난달 14일 출범한 한국택시협동조합은 소속 택시기사들이 개별 주주인 협동조합 형태의 회사다. 2500만원을 내고 조합원이 되면 다른 법인택시와 달리 사납금을 내지 않고, 자신이 번 만큼 이익을 배분받는다는 게 박 이사장의 설명이다. 그는 “사납금이 택시기사들의 불친절을 낳는 주범”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통 주간 근무자는 하루에 12만5000원, 야간 근무자는 14만5000원을 회사에 내야 하는데 이걸 채우기가 아주 힘들다”며 “사납금을 채우려면 승객을 많이 태울 수 있는 곳만 다녀야 하고, 짧은 거리를 되도록 자주 운행하는 게 유리하기 때문에 승차 거부와 신호 위반, 과속과 같은 부작용을 낳는다”고 지적했다. 또 “협동조합의 생명은 투명경영”이라며 “돈 떼어 먹고 달아나는 경영 안 한다는 신뢰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박 이사장은 “조합원 가입비 마련이 여의치 않은 저(低)신용등급 택시기사를 위해 하나은행 SGI서울보증과 손잡고 가입비 대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며 “지금도 하루에 5~10명의 택시기사가 조합원 가입을 문의하러 온다”고 했다. “앞으로 3부제, 3교대 근무를 하려고 해요. 여성과 장애인, 다문화가정 우선 채용도 할 거고요. 조합원이 170명인데 요즘 신규 조합원 증가 속도로 봐선 앞으로 두 배, 세 배로 늘어갈 것으로 봅니다.”
‘울트라 을(乙)’이 돼야 했던 순간들
박 이사장이 택시에 관심을 둔 것은 1999년 12월부터 11개월 동안 택시기사로 일한 경험이 계기가 됐다. 당시 그는 15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후 집을 판 돈으로 생계를 꾸리다 법인택시 기사 자격증을 따고, 서울 화곡동의 금구상운에 취직했다. “왜 택시 일을 했느냐고요? 그때 했던 얘기야 ‘생활정치 실현’이었죠. 그런데 사실 정치 하다가 나오면 정말로 뭘 해야 할지 막막해요. 먹고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 했으니까 제겐 정말 중요한 생업이었죠. 그때 많은 걸 배웠어요. 시민들의 말을 직접 들을 수 있고, 스스로 그렇게 살아가는 생활을 한다는 건 아주 큰 경험이었죠.”
오전 3시부터 오후 3시까지 꼬박 12시간을 일했다. “별의별 사람을 만나면서 승객들이 세상사에 대해 하는 말을 경청했다”고 회상했다. 택시회사에선 ‘의원님’이라고 불리긴 했지만 거리에 나가면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박 이사장은 전했다. “하루를 시작할 땐 아무래도 덜 피곤해요. 그런데 교대시간이 다가오면 정말 피곤해져요. 배가 고파서 밥 먹을까 하면 손님이 오고, 화장실 한 번 갈까 하면 또 손님이 오고, 졸려서 잠깐 눈 좀 붙일까 하면 또 손님이 오고. 택시기사인데 오는 손님을 어떻게 막아요. 그래서 택시기사 중에서 몸이 멀쩡한 사람이 없어요. 저도 그랬고요.”
그런 그에게 올초 기업회생 매물로 나온 서기운수는 놓쳐선 안 될 ‘진흙 속의 보석’처럼 보였다. 서기운수 인수에 필요한 자금은 40억1000만원이었다. 아내의 만류를 무릅쓰고 전 재산 4억원을 계약금으로 썼다. 나머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과정에서 그는 ‘울트라 을(乙)’이 돼야 했다. “정치인 출신이란 게 사업자금을 모을 때 그렇게 발목을 잡을 줄 몰랐습니다. 금융권에서 모두 저를 외면했어요. 17대 국회에서 정무위원회 소속이었는데 하필 거기서 했던 일이 금융권 관련 법률 심의였죠. 전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국회의원 했던 거예요.”
제도권 금융에서 자금을 구하지 못하자 결국 명동 사채업자를 찾아갔다. 사채업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그렇게 해서 인수자금 입금일을 코앞에 두고 잔금 36억여원을 마련, 지난 4월 서기운수를 인수했다. “아내가 저 때문에 두 번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 안 그래도 없는 재산에 나이 예순 넘어 이마저도 홀랑 날려먹고 알거지가 되게 생겼으니 안 쓰러지고 배기겠어요. 지금이야 다행히 사채 자금을 금융권 대출로 갚았지만 그때 생각하면 아찔해요. 불면증도 심했고,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웠죠.”
박 이사장은 “몸으로 겪은 고단함이 결국 자산으로 돌아온다는 걸 실감했다”며 “처음에 경험 삼아 시작한 택시일이 나의 두 번째 인생을 열어 준 연결고리가 됐다”고 말했다. “정치인들이 종종 이벤트로 하는 ‘일일 택시기사’ 체험의 원조 아니냐”는 물음엔 “솔직히 그런 말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며 “이 일은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힘든 일”이라고 정색하며 대답했다.
“정계 복귀 생각하기엔 너무 바빠”
정치무대로 돌아올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박 이사장은 “전혀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하지는 않았다.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라는 말 또한 없었다. 그는 “정계 복귀를 생각하기엔 너무 바쁘다”고 답했다.
“오는 9월 부산에 있는 택시회사를 하나 인수하려고 추진하고 있어요. 서울을 시작으로 부산과 대구, 인천 같은 주요 도시로 사업을 확대할 생각입니다. 망하기 직전이지만 잘 살리면 회복 가능한 업체가 꽤 있어서 물색 중입니다. 또 11월엔 국회에 200명 규모의 청소용역협동조합도 만들 겁니다. 지금 머릿속에 앞으로 4~5년간의 계획이 가득해서 정치 생각할 틈이 없어요.”
박 이사장은 “돌이켜 보면 나만큼 사연 많고, 또 오해도 많이 받은 사람도 없는 것 같다”며 “정치인으로 살던 시절보다 지금이 마음 편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또 “정치하면서 세상모르고 까불었던 시절을 거울삼아서 이제 예순 넘어 새로 시작하는 일,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신명 나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 택시기사의 하루는
법인택시, 주야 2교대…만성 허리디스크 시달려
택시기사는 흔히 법인 소속과 개인택시로 구분한다. 택시 번호판엔 ‘바’ ‘사’ ‘아’ ‘자’ 네 글자만 쓴다. 서울에만 약 7만대(법인 2만5000여대, 개인 4만5000여대)의 택시가 있다.
개인택시 기사 자격증을 따려면 법인택시 무사고 운전경력 3년 이상 또는 법인 차량 무사고 경력 6년 이상이어야 한다. 개인택시 기사는 1978년부터 3부제를 도입, 이틀 일하고 하루 쉰다. 법인택시 기사 자격시험은 1종 및 2종 보통 운전면허를 소지한 만 20세 이상 성인이면 응시할 수 있다. 학력을 비롯한 다른 조건은 따지지 않는다.
법인택시는 일반적으로 하루 2교대 근무다. 주로 오전 4~5시, 오후 4~5시가 교대 시간이다. 승객을 태우느라 끼니를 제때 못 챙길 때도 많고, 종일 앉아서 운전하기 때문에 만성 위장염이나 목·허리 디스크에 시달리는 기사가 많다.
한 달 소득은 개인차가 있지만 평균 125만~135만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루 수입 중 의무적으로 회사에 내야하는 사납금 관행에 기사들의 불만이 매우 많다. 업계 관계자는 “노동 강도에 비해 소득이 적고, 기사 대부분이 연령대가 높아 반 년도 안 돼 퇴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전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택시기사들 사이에선 개인택시 자격증을 얻으려는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개인택시 자격증을 신규 취득하는 조건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기사들끼리 자격증을 매매하는 경우가 많다. 7500만~1억원을 호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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