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작품 사들이는 기업들 '제2의 메디치가' 꿈꾼다

입력 2015-08-30 18:13  

다임러·시세이도 등 600여사, 작년 작품 매입에 8800만弗 써
이미지 제고에 수익도 쏠쏠…글로벌 기업 '아트테크' 열풍



[ 나수지 기자 ] 독일계 투자은행 도이치뱅크의 영국 런던 본사인 ‘윈체스터 하우스’ 로비엔 하얀 화강암 덩어리처럼 보이는 조각작품이 있다. 영국 조각가 토니 크랙의 1998년작 ‘분비물(secretion)’(사진)이다. 이 조각 옆에는 살아있는 작가 중 가장 작품값이 비싼 데미안 허스트와 인도계 영국 조각가 애니시 카푸어의 작품도 있다. 도이치뱅크가 소유한 6만여점 작품 중 일부다. 미국계 투자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차일드 하삼 등 미국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 현대미술 작품 투자를 늘리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실내장식이라는 ‘실용적인’ 이유 외에 예술가를 후원하는 기업이라는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15~16세기 이탈리아 피렌체공화국에서 학문과 예술을 후원해 르네상스를 주도한 메디치가(家)의 역할을 기업들이 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엔 현대미술 작품의 가격이 급격히 올라 보유자산 가치가 증가하는 효과도 누리고 있다.

지난 6월 투자회사 도이치스탠다드가 펴낸 ‘글로벌기업콜렉션’에 따르면 미술품을 공식적으로 수집하는 기업은 프랑스 보험사 악사(AXA), 독일 자동차회사 다임러, 일본 화장품회사 시세이도 등 600여개사다.

이들 기업이 지난해 경매에서 매입한 미술 작품 가격을 합치면 8800만달러(약 1031억원). 그러나 실제로는 더 많은 돈이 투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주들이 당장의 수익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미술 작품 투자를 썩 내켜 하지 않기 때문에 기업들이 경매를 통해서보다는 작가나 딜러를 직접 접촉해 미술작품을 사는 경우가 많다고 FT는 전했다.

기업들은 과거에도 미술품을 사들였다. 하지만 돈 많은 기업가의 취미활동에 가까웠고, 탈세와 돈세탁 등의 통로로 이용되는 일도 잦았다. 기업들이 매입하는 미술품도 기업가 개인의 취향이 주로 반영됐다.

하지만 최근 기업들은 보다 전략적으로 미술품을 사들이고 있다. 로아 픽텟 현대미술콜렉션국제기업연합(IACCCA) 회장은 FT에 “자체적으로 미술품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전문적인 조직을 갖춘 기업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이 미술품에 관심을 갖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기업 이미지 제고다. 스위스 최대은행인 UBS의 스티브 맥큐브리 큐레이터는 “(UBS는) 금융 투자를 넘어 문화 투자를 지향하기 위해 미술을 후원한다”며 “이는 공동체와 기업 모두에 장기적으로 이득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투자 목적도 있다. 지난 10년간 경매를 통해 거래된 현대미술 작품의 가격?600% 올랐다. 지난 5월에는 스페인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알제의 여인들’이 미술 작품 사상 최고가인 1억7936만5000달러(약 1968억원)에 팔렸다.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청동상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남자’도 1억4128만5000달러(약 1549억원)에 낙찰돼 조각품 가운데 역대 최고가를 경신했다.

나수지 기자 suj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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