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그가 컴퓨터, 지금의 눈으로 보면 빈약하고 형편없기 짝이 없는, 덩치만큼은 대형트럭에 육박하는 거대한 외양의 초기 버전 컴퓨터를 처음 만난 것은 바로 '레이크사이드' E8(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 2학년에 해당)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p>
<p>항공공학 석사에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 불문학 석사 학위까지 받고, 해군 조종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한 '레이크 사이드'의 수학교사 빌 더글이 레이크사이드 어머니회에 제안해 학교에 초기 컴퓨터 단말기를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p>
<p>"이제는 우리 학생들이 컴퓨터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춘 채 대학에 가야 할 시대입니다."</p>
<p>6년 전 시애틀의 엑스포를 경험한 어머니회는 즉각 바자회 수입금의 일부를 할애해 컴퓨터 설치비와 1년치 사용료를 책정하는 것으로 지원에 나섰다.</p>
<p>당시 컴퓨터를 처음 만난 레이크 사이드 10대 소년들의 감동은 매우 컸다. 게이츠의 평생 친구인 폴 앨런은 이렇게 적었다.</p>
<p>"텔레타이프(당시의 컴퓨터 단말기)는 저음의 윙윙거리는 소리, 종이 테이프 펀치의 기관총 소리 그리고 프린터 키의 철커덩 소리가 혼합된 멋진 소음을 냈다…ASR-33은 시끄럽고 느린 데다가 디스플레이 화면이나 소문자 입력 기능도 갖추지 못한 멍청한 원격 터미널이기는 했지만 최첨단 기술이기도 했다. 나는 넋이 나갔다. 이 기계로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직감이 들었다."</p>
<p>나중에 '레이크 사이드의 해커 동지들'이라는 표현을 얻게 된 이 소년들이 바로 시애틀을 미국의 새로운 정보통신 산업의 중심지로 부상시킨 주역들이다.</p>
<p>소년들은 거대한 컴퓨터를 자기 뜻대로 작동시키기 위해 그 어떤 제대로 된 프로그램도 없던 시절, 제대로 가르쳐주는 스승도 없던 시기, 미지의 바다로 뛰어들어 용감하게 헤쳐나가기 시작했다.</p>
<p>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프로그램을 만들고, 서로 명령어와 프로그래밍 요령들을 공유했다.</p>
<p>빌 게이츠도 처음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틱택토'라고 하는 미국식 오목게임(O와 X를 맡은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표시해 먼저 3개를 나란히 만들면 이기는 방식)의 컴퓨터용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3살 때였다.</p>
<p>하비 모털스키는 컴퓨터의 랜덤 숫자 생성기를 주사위로 활용하는 텍스트 기반의 '모노폴리'를 개발했고, 바브 맥코는 코드 300줄이 들어가는 버추얼 카지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p>
<p>당시 레이크 사이드 학교의 해커들은 한 달 만에 어머니들이 배정해 준 컴퓨터 사용료 1년치 예산을 다 써버렸다. 그 해 1968년은 컴퓨터 역사에서 매우 의미있는 한 해였다.</p>
<p>바로 이 해에 휴렛 패커드는 최초로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데스크톱 계산기를 출시했다. 또한 임의접근 기억 장치인 D-RAM을 발명해 특허를 받았고,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가 인텔을 공동 창립한 해도 바로 그 해다.</p>
<p>♦ 알테어 컴퓨터</p>
<p>소년 해커들의 '모험'은 1972년 여름 폴 앨런이 빌 게이츠에게 전자 전문잡지 <일렉트로닉스> 한 귀퉁이에 실린 10줄짜리 기사를 보여주면서 흥미나 취미 수준을 뛰어넘어 진짜 모험이라고 할 수 있는 '비즈니스로의 모험'으로 발전한다.</p>
<p>인텔이라는 신생 기업에서 8008이라는 마이크로 프로세서 칩을 내놓았다는 기사를 보며 둘은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p>
<p>컴퓨터의 두뇌에 해당하는 이 최초의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가진 성능은 앞으로 굉장히 빠르게 향상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컴퓨터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p>
<p>그로부터 3년 뒤 하버드 대학 2학년 때인 1975년 게이츠는 앨런과 함께 하버드 스퀘어에서 <포풀러 일렉트로닉스·Popular Electronics>에 실린 한 조립 컴퓨터 사진을 보고 흥분에 빠진다.</p>
<p>미국의 인기공상 과학 드라마 <스타 트렉>에 나오는 행선지 이름 '알테어'를 따서 이름 붙인 최초의 본격 개인용 컴퓨터가 나왔다는 것이다. 빌과 폴은 이 알테어 컴퓨터가 정확히 어떤 용도로 쓰이게 될 지는 몰랐지만, 궁극적으로 그들 자신과 컴퓨터 업계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었다.</p>
<p>특히 두 사람은 당시 점차 성능이 크게 향상돼 가는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프로그래밍 언어를 갖게 되면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다고 깨달았다.</p>
<p>프로그래밍 언어는 컴퓨터의 두뇌인 마이크로 프로세서에게 명령을 내려 작업을 수행하게 해준다. 당시의 컴퓨터는 이것이 아직 개발돼 있지 않았다.</p>
<p>폴과 게이츠는 앞으로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보다 더 성능이 향상되고 대량 생산으로 가격마저 적정하게 떨어지면 개인들도 저마다 뛰어난 성능의 컴퓨터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p>
<p>새로운 컴퓨터 문명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단이 필요했다. 바로 '진로'에의 결단이 필요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p>
<p>당시 게이츠는 하버드대 2학년 학생이었고, 폴은 워싱턴주립대학 컴퓨터공학과를 3년 다닌 뒤 휴학하고 취직을 한 상태였다.</p>
<p>폴의 부모들은 컴퓨터와 관련된 일에 대해 대부분의 부모들처럼 미심쩍어했다. 하지만 폴은 이미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당시에는 휴학을 해서 프로그래머로 취직까지 한 상태였다.</p>
<p>정작 게이츠가 문제였다. 게이츠의 부모는 자식의 미래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존중해 주었다. 진보적이면서도 절제된 가풍의 집안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p>
<p>게이츠의 누나 크리스티도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전교 수석으로 졸업하더니 나중에는 거대한 회계회사의 회장직에 올랐다.</p>
<p>게이츠의 부모는 게이츠의 진로와 관련해 마음으로는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당연히 하버드에서도 법학을 전공하기를 바랐다. 이런저런 이유로 게이츠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의 진로에 대한 구상이 정리되지 못하고 복잡한 상황이었다.</p>
<p>어릴 때는 과학과 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과학자가 된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동시에 경영에 대한 관심도 컸다.</p>
<p>유명 변호사인 아버지는 집에서 미국의 경영자 전문 매거진 <포춘>을 정기구독하고 있었다. 게이츠는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포춘>을 탐독해 왔다. 게이츠는 나중에 폴에게 <포춘> 신년호를 보여주며 이렇게 이야기 했다.</p>
▲ 빌 게이츠의 개인 블로그와 그가 요즘 읽고 있는 책들(사진=빌게이츠 블로그) |
<p>게이츠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법학 뿐 아니라 경제학을 공부한다는 생각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다 폴과 컴퓨터의 미래에 대해 토론하고 속속 업그레이드 되어 나오는 초기 소형 컴퓨터에 특화된 프로그램을 직접 개발하면서 전공을 응용 수학으로 바꿨다. 그런데 이마저 버려야 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었다.</p>
<p>대형 컴퓨터를 생산하는 거대기업 IBM 본사.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는 IBM에 운영체제를 납품하면서 비약적인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다.</p>
<p>게이츠와 폴은 무엇보다 새로운 소형 컴퓨터 '알테어'의 운영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미래를 결정짓는 최대의 관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p>
▲ 알테어 컴퓨터(사진=QOMPASS 미디어) |
<p>당시 그들이 얼마나 혼신의 힘과 능력을 모아 최선을 다했는지 게이츠는 이렇게 기억한다.</p>
<p>"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들려면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알테어를 위한 베이식(운영 프로그램)을 짜는 동안 내 몸은 파김치가 되었다. 1975년 겨울 나는 기숙사 방안을 수없이 맴돌았다. 폴과 나는 늘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우리는 밤낮을 잊고 살았다. 책상에 앉아 있거나 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기 일쑤였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았고, 온종일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베이식은 5주 만에 완성되었다."</p>
<p>빌 게이츠는 1995년 발간된 그의 첫 번째 저서 <미래로 가는 길>에서 이렇게 회고를 이어간다.</p>
<p>"지금 뛰어들지 않으면 장래의 소형 컴퓨터를 위한 소프트웨어 세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도 영원히 놓치게 된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었다. 1975년 폴은 원래 다니던 회사의 프로그래머 일을 그만 두었고(당시 폴은 하니웰에 다니면서 퇴근 뒤부터 새벽 3시까지 게이츠와 함께 알테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1인 2역을 해냈다), 나는 대학에 휴학원을 제출했다."</p>
<p>게이츠가 하버드를 떠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모님과 상의해,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부모를 설득했다.</p>
<p>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차리겠다는 게이츠의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를 깨달은 부모는 아들의 뜻을 받아들였다.</p>
<p>처음에 게이츠는 하버드를 떠나는 것에 대해 다소 여유를 가지고 생각하기도 했다. 잠시 공부를 그만두고 회사를 차렸다가 나중에 돌아와 학업을 마친다는 식으로 말이다.</p>
<p>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장기 휴학이 가능한 시스템이다. 10년 뒤, 20년 뒤에도 대학에 복학해 학위를 마칠 수 있다. 그러니까 게이츠도 이런 장기휴학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p>
<p>그러나 그는 결국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버드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떠났다'라고 해야 맞다.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의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렇게 해서 세상에 탄생했다.</p>
<p>"나는 대학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내 또래의 똑똑한 친구들과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회사를 차릴 수 있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열아홉의 나이로 그렇게 나는 사업의 세계에 뛰어 들었다."</p>
오귀환 한경닷컴 QOMPASS뉴스 기자 rain4spring@qompa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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