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한·중 관계, 기울면 무너진다

입력 2015-09-09 18:15  

김현석 산업부 차장 realist@hankyung.com


외교·통상 쪽 관료들이 치를 떠는 사건이 있다. 15년 전인 2000년 일이다. 당시 한·중 관계는 무르익었다. 1998년 말 김대중 대통령의 국빈 방문과 1999년 두 차례 정상회담이 이어지며 수교 9년차의 양국 관계는 북·중 관계보다 더 가까운 듯했다.

그러나 한·중 관계의 장밋빛 환상은 ‘마늘 파동’으로 깨졌다. 당시 통마늘에만 360% 관세를 매기던 제도 탓에 중국산 냉동마늘과 초산마늘이 쏟아져 들어왔다. 농가 피해가 커졌다.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따라 정부는 그해 6월 냉동 및 초산마늘에 대한 관세율을 30%에서 315%로 올리는 세이프가드를 발동했다. 정상적 조치였다.

힘의 균형이 바뀌면…

1주일 뒤 중국은 보복 조치를 내놨다.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 수입을 전면 중단시킨 것이다. 국제법에 어긋났지만, 중국은 당시 WTO 가입국이 아니어서 제소할 수 없었다. 한국은 대(對)중국 무역에서 흑자를 내고 있었던데다, 또 어떤 보복을 들고나올지 모를 일이었으니….

한국은 한 달 만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3년간 매년 3만2000~3만5000㎏의 마늘을 30~50% 관세율로 사주기로 했다. 세이프가드를 취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해야 했다.

한반도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4강(强)에 둘러싸여 있다. 이들 간 힘의 균형이 무너질 때마다 한반도엔 위기가 닥쳤다.

구한말 중국이 외세 침략에 시달리자 조선은 유린당했다.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하자 한반도는 일본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런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뒤에는 남과 북으로 분단됐다.

최근 다시 역학 관계에 변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급격한 부상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주 중국에 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시진핑 국가주석과 회담하며 오찬을 했다. 톈안먼광장 열병식 땐 시 주석의 옆옆자리에 앉았다. 국내 언론은 한·중 관계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쏟아냈다.

미국과의 동맹 더 중요해져

대신 맹방인 미국과는 소원해지는 분위기다. 미국이 최우선시하는 일본과는 과거사 분쟁을 빚으며 틈이 생겼다. 중국이 사상 최대의 ‘군사 쇼’를 벌일 때 톈안먼 망루 위에 있던 미국의 우방국 정상은 박 대통령이 유일했다. 존 케리 미 국무부 장관은 “충분히 이해한다”고 했다지만, 속마음은 모른다.

지금의 우리 모습은 구한말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주변 4강을 무시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다. 외교적 레버리지(지렛대)를 일으킬 수 있는 정도는 되지만, 한쪽으로 치우치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2007년 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한창일 때 일이다. 당시 ‘광우병 소’ ‘투자자국가소송(ISD)’ 등을 둘러싼 논란이 컸다. 답답해하던 한 고위 관료?기자에게 “한·미 FTA는 무조건 맺어야 한다. 작은 이익을 따지다 일을 그르치면 안된다. 미국과의 FTA는 우리가 중국으로 끌려가는 걸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레버리지”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중국에 끌려다니다가는 어찌될지 모르니 미국을 이용해 국익을 지켜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 관료는 은퇴했다. 그가 주장했던 개념도 우리 정부에서 은퇴했는지 모르겠다. 그게 걱정이다.

김현석 산업부 차장 reali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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