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선 제작 방식에서 착안
가상 시뮬레이션 SW 개발
비행기서 자동차·골프채까지
전세계 제조기업 90%가 사용
[ 이정선 기자 ]
유럽 항공기 제조회사인 에어버스가 2007년 10월 첫선을 보인 A380 항공기. ‘하늘의 유람선’으로 불리는 A380은 무게만 245t에 이르는 세계 최대 여객기다. 비행기는 무거울수록 연료 소모가 많을 수밖에 없다. 에어버스가 2000년 개발에 착수할 때 가장 신경을 쓴 부분도 무게였다.
에어버스는 당시 A380의 날개 제작을 영국 대형 군수업체인 BAE시스템스에 의뢰했다. 가벼우면서도 성능의 표준을 지켜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구조 설계에 매달리던 BAE시스템스는 뾰족한 방법을 찾아내질 못했다. 납품까지 8주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다급해진 BAE시스템스의 고민을 해결해준 건 컴퓨터 응용 엔지니어링사 알테어(Altair)였다. 알테어는 수학적 알고리즘을 동원해 비행기 날개의 뼈대(rib) 구조를 구멍이 숭숭 뚫린 격자형으로 바꿔 500㎏의 무게를 줄이는 데 성공했다. 이 구조는 항공사 날개 제작 역사상 가장 독특한 설계로 꼽힌다.
NASA 우주선 제작기법에서 착안
알테어는 세계 제조업의 혁신을 이끌고 있는 CAE(컴퓨터응용공학·computer aided engineering) 분야에 특화된 회사다. CAE는 간단히 말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제품의 구조를 설계하고 가상의 제품까지 만들어내는 분야를 가리킨다. CAD(컴퓨터 응용 디자인)에 비해 진일보한 엔지니어링 기법이다.
알테어는 1985년 미국 자동차회사 포드의 엔지니어였던 제임스 스카파 회장이 미국 미시간주 사우스필드에서 창업했다.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아직 생소하고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 특화된 기술이던 CAE의 잠재력을 내다본 것이다. 그가 28세였을 때다.
그때만 해도 CAE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우주선을 제조할 때 사용하던 첨단기술이었다. 막대한 제작비가 들어가는 우주선은 일반 제품과 달리 시제품을 만들어 테스트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에 대한 대안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활용한 CAE 기술이다. 실물에 근접한 가상의 제품을 컴퓨터로 만들어 우주선 발사와 운항 단계에 예측되는 기계학, 역학 등과 관련한 실험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NASA는 수천 번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안전성을 테스트한 뒤에야 우주선을 제작해 발사한다.
자동차회사 엔지니어 출신인 스카파 회장은 이런 기술의 발전 방향 ?놓치지 않았다. 그는 NASA 등 과학자들의 영역이던 CAE 소프트웨어가 곧 자동차 제조에도 응용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제조업의 리스크 테이커(risk-taker)”
엔지니어링 컨설팅으로 출발한 알테어는 CAE 소프트웨어 개발에 착수해 창립 5년 만인 1990년 ‘하이퍼메시’라는 히트작을 내놓았다. 하이퍼메시는 컴퓨터 안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제품을 격자 무늬로 재구성한 뒤 최소한의 단위로 쪼개는 이른바 ‘메싱(meshing)’ 작업을 통해 구조와 재질, 강도 등을 테스트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이퍼메시는 제조 시뮬레이션의 표준 역할을 하면서 전 세계 제조기업의 90% 이상이 사용하는 독보적인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다.
제조업에서 CAE가 특히 중요해지고 있는 이유는 비용과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어서다. 모든 테스트가 가상의 컴퓨터 공간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크게 줄일 수 있다. 현재 CAE가 가장 많이 활용되는 분야는 자동차 제조업계다. 예컨대 신차 개발의 중요 과정인 충돌 테스트도 컴퓨터로 할 수 있다. 양산 단계가 아니라 한 대당 수억원에 이르는 테스트용 차를 많이 만들 필요도 없어진다. 우주선 개발 공정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알테어의 이런 역할을 빗대 제임스 회장은 평소 “우리는 리스크 테이커(risk-taker·위험 감수자)”라고 말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설계 혁명이 자동차산업에 휘몰아치고 있다’는 제목의 2013년 10월20일자 기사에서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컴퓨터 파워를 활용해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빠르고 값싸게 제품을 고안하고 테스트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포드 관계자는 “몇 달 동안 수백만 달러를 투자해 신제품을 내놓던 개발 과정이 불과 수천 달러를 들이고도 며칠 만에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자동차 제조 CAE업계 선두주자
CAE 시장 규모는 20여억달러(약 2조4000억원)로 추산된다. 세계 20개국, 50개 지사에 진출해 있는 알테어는 CAE업계에서 1~2위를 다투고 있다. 자동차 분야는 물론 항공, 중장비, 생명공학, 전자, 에너지, 정부기관 등 5000여개 고객사를 확보하고 있다. 포드, GM, 에어버스, 알스톰, 바스프, IBM, 엑슨모빌 등이 알테어의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 특히 자동차 분야의 CAE 시장에서는 독보적인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동안 알테어가 설계한 제품은 비행기 날개에서부터 자동차, 자전거 부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골프채와 미식축구용 헬멧 설계에도 알테어의 기술이 접목됐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컴퓨터가 최적의 구조를 제안해주기 때문에 인간의 상상이나 직관으로는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는 창의적인 디자인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 알테어 측의 설명이다. 알테어의 지난해 매출은 약 3억달러(약 3600억원)로 매년 평균 10% 이상의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올해 매출 증가율 목표는 20% 선이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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