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수정 기자 ] “국정감사 때 혼나지 않으려고 기업이 망할 수도 있는 정책을 추진하는 곳이 바로 금융당국입니다.”
한 대기업 재무담당 임원은 기자에게 전화해 격한 발언을 쏟아냈다. 지난달 27일 본지가 ‘어닝쇼크 17개사, 회계법인 바꿔라’는 기사를 보도한 직후였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중순 4대 회계법인 관계자를 소집했다. 회계 의혹이 나올 수 있는 17개 상장사를 추려냈으니, 해당 기업을 감사하는 회계법인들은 알아서 감사계약을 해지하고 각 기업은 9월 중 금감원에 감사인을 새로 지정해줄 것을 ‘자율적’으로 신청하라는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외부감사인 자율지정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것이었다. 지정 신청을 하지 않으면 불가피하게 감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말만 자율이지 사실상 강제라는 기업들의 토로가 쏟아졌다.
12월 결산법인의 외부감사 계약시기는 3~4월이다. 그런데 금감원이 생뚱맞게 9월 중 감사인 교체를 요구하자 업계에선 ‘국감 대비용’이란 비판이 나왔다.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 의혹에 대한 관리감독 문제로 질타를 당할 것을 우려한 금감원이 ‘선제적인 대책’을 내놨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회계연도 중간에 감사인을 바꾸면 평판 추락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회계 의혹 때문에 감사인을 중도 교체한 사실이 알려지면 해외 프로젝트는 중단되고 자금줄은 마르고 주가도 급락할 것”이라며 “존폐의 위기가 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해당 기업들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상대는 금감원이었다. 예상되는 갖가지 어려움을 읍소하고 다녔다. 금융위원회도 당장 도입은 무리라는 의견을 보였다. 결국 금감원은 ‘자율지정제도’ 도입을 내년으로 미뤘다.
자율지정제도는 기업 스스로 회계 의혹을 해소할 기회를 줄 뿐 아니라 턱없이 모자라는 금감원의 감리인력을 감안한 합리적 대안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금감원의 무리한 행보로 제도의 좋은 취지는 퇴색하고 반발만 사는 결과를 낳았다. 금융당국은 보신주의 때문에 교각살우(矯角殺牛)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이제 지겹지도 않은가.
하수정 증권부 기자 agatha7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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