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필연적 붕괴를 말한 카를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1883년, 그해 조지프 슘페터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차례로 태어났다. 애덤 스미스와 함께 ‘빅4’로 불리는 경제학자 중 3명이 같은 해 생(生)과 사(死)가 갈린 것이다. 자본주의 운명이란 관점에서 보면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1929년 시작된 대공황으로 부상한 케인스는 살아서 각광받았지만, 자본주의를 기업가에 의한 창조적 파괴로 파악한 슘페터는 케인스에 가려 그렇지 못했다. 케인스는 슘페터를 의식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 같고, 슘페터는 그런 케인스의 일반이론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단기·장기, 수요·공급 이분법
이들의 탄생 100주년이던 1983년. 케인스보다 탁월한 경제학의 거성은 슘페터라고 말한 이는 바로 피터 드러커였다. 당시 드러커는 슘페터야말로 다시 평가받고 기억돼야 할 인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세상은 경제가 조금이라도 안 좋다 싶으면 바로 케인스 프레임으로 내달리기 일쑤다. 한국만 봐도 그렇다. 재정지출, 저금리 등으로 경제를 일단 살리고 봐야 한다는 논리가 팽배하다. 이런 상황에선 경제구조 변화, 기술 진보 등을 아무리 외쳐봐야 공허한 메아리일 수밖에 없다.
만약 케인스와 슘페터가 생전에 대화를 나눴다면 역사가 달라졌을까. 네이 마사히로 일본 교토대 교수는 ‘현대경제학 이야기’에서 두 사람 간 교류가 없었다는 걸 불행한 일로 꼽는다. 그로 인해 케인스와 슘페터는 그만 도식화로 굳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케인스의 유효 수요는 ‘단기’, 슘페터의 이노베이션은 ‘장기’로, 다르게 말하면 단기에선 ‘수요 측면’이, 장기에선 ‘공급 측면’이 중요하다는 식이 돼 버렸다.
이렇게 도식화하고 나면 우선순위를 갖는 것은, 늘 ‘단기’일 수밖에 없다. 당장 선거구민의 표를 사야 하는 대중민주주의 현실에서 정치인의 선택은 언제나 케인스다. 이것이 케인스의 현실적 위력이지만 불행히도 결과는 치명적이기 일쑤다. 재정적자의 누적, 바로 걷잡을 수 없는 국가 부채가 그것이다. 정치인의, 또 시류에 영합하는 경제학자의 ‘장기’란 그저 ‘단기의 합’일 뿐이다.
도식화에 함몰돼 버린 정권
물론 겉으로 내뱉는 말은 짐짓 균형을 취한 척한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를 보라. “단기적으론 경기부양책, 장기적으론 구조개혁”을 밥 먹듯이 외친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이 늘 단기로 끝난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죽었다 깨어나도 들리는 건 여전히 단기일 뿐, 우리가 원하는 장기는 결코 오지 않는다. 이게 비극이다.
케인스와 슘페터의 대치는 그래서 더 아쉬운지 모르겠다. ‘정 适稚袖?아니면 수요를 창출할 길이 없나’ ‘이노베이션이 창출하는 수요는 뭔가’. 대화하다 보면 ‘이노베이션과 수요의 선순환론’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단기=수요, 장기=구조개혁’이란 도그마도 그렇다. 오히려 ‘수요창출형 구조개혁’이 널리고 널렸다. 공공 노동 금융 교육 등 4대 구조개혁, 의료 법률 등 서비스 개혁이 다 마찬가지다. 제대로만 건드리면 수요가 폭발할 정도다.
케인스와 슘페터의 만남 부재보다 정작 탓해야 할 것은 도식화에 빠진 사람들이다. 그것도 창조경제를 외치는 사람들이 저러고 있다. 차라리 리더십이 없다면 없다고 할 것이지. 비겁한 정권이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경영과학 박사 a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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