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29초영화제

입력 2015-09-18 18:07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서울남부구치소의 한 독방. 중년 남성이 막내딸의 편지를 만지작거리다 끝내 눈시울을 붉힌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법이 제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며 절실히 반성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의 출품작은 ‘법은 나에게 학교다’였다. 인천구치소의 한 재소자는 수감 중인 자신의 손을 ‘고장 난 불량품’이라고 여기다 아버지 영정 사진을 보며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 가족을 다독이는 이 손이 불량품일 리 없다’며 용접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 작품 제목은 ‘인생 사용 설명서’다.

그저께 시상식을 한 ‘법무부 29초영화제’의 출품작마다 이 같은 사연이 빼곡하다. 지난달 10일부터 시작된 이번 영화제에는 전국 보호소와 교정시설에서 1400여편의 시나리오가 몰렸다. 일반인 작품도 300여편이나 됐다. 직장인 공승규·곽일웅 씨는 절박한 순간에 채무이행각서의 보증인을 ‘법’이라고 적는 장면을 담은 ‘대한민국 법은 우리들의 보호자이다’로 일반부 대상을 받았다.

우리 사회 곳곳의 눈물겨운 얘기를 짧은 영상에 담아내는 29초영화제는 공감과 소통을 주제로 한 영화축제다. 인간의 집중력이 가장 높게 지속된다는 29초 동안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낸 영상들을 뽑아 시상한다. 한국경제신문 주최로 2011년부터 지금까지 20여차례 열렸다. 누적 참가자는 약 500만명. 법무부, 국방부, 국민안전처, 서울시, 현대자동차, 신한은행, AXA다이렉트, 에쓰오일 등 공공부문과 기업들이 두루 참여했다.

지난해 동아제약과 함께한 ‘박카스 29초영화제’의 최우수작 ‘투명아빠로 산다는 것’(배영준)은 동아제약 CF로 제작돼 전국 방송을 탔다. 진심과 달리 딸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지 못하는 가장의 고충을 유머러스하게 다룬 수작이다. 이를 포함해 4편의 CF가 ‘소비자가 뽑은 좋은 광고상’ TV부문 대상을 받았다.

올 4월의 ‘국군 29초영화제’에는 배우인 탁트인 병장이 장갑차를 등장시킨 작품을 출품해 ‘29초짜리 블록버스터급’ 영화라는 호평을 받았다. 여자친구의 수상작 덕분에 4박5일 휴가를 얻은 군인도 있었다. ‘29초 119 영화제’에서 소방관 가장을 기다리는 가족을 인상적으로 포착한 장영환 씨는 영화제 수상작 덕분에 지난해 소방의 날 대상도 차지했다.

‘누구나 감독이 될 수 있다’가 29초영화제 슬로건이다. 작품 분량이 짧은 데다 특별한 장비 없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자유롭게 제작할 수 있다. 다음주부터는 ‘경찰 29초영화제’가 시작된다. 상금도 2000만원이나 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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