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민영화 시발점" 시비로 제주 외국인 투자병원 설립 난항
병원 상장도 가능한 태국·싱가포르는 의료 관광객 대거 유치
[ 조미현 기자 ] 제주국제공항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서귀포시 토평동 제주헬스케어타운. 서귀포시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는 연면적 1만7000㎡, 47병상 규모의 녹지국제병원이 들어설 예정이다. 공사비 779억원은 중국 녹지그룹이 전액 투자한다. 제주도에선 지난 7월 병원 건설 허가를 내줬다. 보건복지부의 사업계획 승인만 남겨두고 있다. 녹지국제병원이 설립되면 국내 1호 외국인 투자병원이 된다.
하지만 제주 시민단체들의 반발이 거세다. 이들은 외국인 투자병원이 ‘의료 민영화’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국내 병원 영리화’ ‘의료 공공성 붕괴’ ‘의료비 폭등’ 등 반대 논리를 펴며 집회도 마다치 않는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외국인 투자병원 설립은 제주도 관광의 질적 고급화를 위한 대안”이라며 “법적 타당성을 갖춘 사업인데도 시민단체들이 억지 논리로 도민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0년간 허송세월
한국의 의료산업은 차세대 먹거리로 손꼽힌다. 하지만 의료산업의 혁신과 변화에 대한 요구는 대안 없는 반대에 무력하다. 세계적인 의료 기술과 서비스를 갖췄음에도 산업화에는 유독 뒤처진 이유다. 투자 개방형 병원 설립, 원격진료 도입 등은 논의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대로다. 그 사이 중국, 태국, 인도 등 신흥국들은 규제를 적극 완화하고 해외 자본과 관광객을 끌
들이고 있다.
인천시는 경제자유구역 송도에 10년 전 외국인 투자 종합병원 설립을 추진했지만 한 곳도 짓지 못했다. 2005년 뉴욕프레스비테리안병원, 2009년 미국 존스홉킨스병원, 2011년 일본다이와증권캐피털마켓 등 해외 병원 및 투자자들과 병원 설립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의사단체와 시민단체에서 ‘영리병원 논란’을 제기하면서 투자의 불확실성을 키웠기 때문이다.
경제자유구역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해보자는 제안은 통하지 않았다. ‘외국인 투자 허용→국내 병원 영리화→의료비 폭등→의료 공공성 붕괴→의료 민영화’라는 반대 논리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태국·싱가포르 병원 상장도 가능
의료 민영화 같은 해묵은 논란이 10년 넘게 지속되는 동안 중국 싱가포르 태국 등 신흥국들은 외부 자본을 경쟁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지난해 중국 정부는 베이징, 톈진, 상하이 등 7개 지역에서 외국인 투자자가 병원을 단독으로 짓거나 기존 병원을 인수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동안 외국인 투자자는 병원 지분의 70%만 소유할 수 있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중국인 파트너에게 휘둘리다가 사업을 철수하는 일이 많아지자 중국 정부가 규제 개선에 나선 것이다. 김남훈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한국 의료서비스에 대한 중국인들의 선호도가 높다”며 “중국 정부가 나서 투자 리스크를 줄여주기 위한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전했다.
싱가포르와 태국은 이미 의료산업에서 한국을 앞선 지 오래다. 싱가포르와 태국 모두 민간병원의 증시 상장을 허용할 정도로 외부 투자에 개방돼 있다. 병원의 인수합병(M&A)도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해외 의료면허를 가진 국제 인력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싱가포르와 태국을 방문하는 의료 관광객은 각각 연간 250만명과 120만명에 달한다. 한국은 21만명에 그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2005년 뉴욕프레스비테리안병원을 유치했다면 싱가포르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국내 병원에 대한 투자를 개방하면 생산유발액은 10조9000억원, 창출될 일자리는 10만2000개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원희룡 제주지사 "적법절차 거친 녹지병원 무조건 반대는 소수의 횡포"
“자기 의견이 관철될 때까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소수의 횡포 아닙니까.”
지난달 17일 제주도청 집무실에서 만난 원희룡 제주지사는 녹지국제병원 설립을 반대하는 시민단체를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그는 “제주 시민단체뿐 아니라 전국 의료단체에서 녹지국제병원 설립을 반대하고 있다”며 “제주도에 외국인 투자병원이 설립되면 전국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주장은 비약”이라고 꼬집었다. 외국인 투자병원은 경제자유구역특별법, 제주도개발특별법 등에 근거해 특정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설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 지사는 “공청회 등을 통해 정당하게 입법 절차를 거친 사업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자는 것은 하지 말자는 뜻 아니냐”며 “법이 정한 요건에 맞지 않으면 허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병원 자체를 설립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녹지국제병원은 2011년 제주도와 국토교통부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가 조성을 시작한 제주헬스케어타운 안에 설립되는 병원이다. 2017년 개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원 지사는 저비용·패키지 관광객이 많은 제주에 고급 관광객을 끌어오기 위해 헬스케어 등 고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농업 종사자가 많은 제주에서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법 역시 관광의 질을 끌어올리는 게 답이라는 것이다. 녹지그룹에 병원 설립을 제안한 것도 원 지사다. 그는 “리조트 호텔이 들어서는 헬스케어타운에 병원이 없으면 부동산 개발사업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관광의 고급화를 위해서는 병원 설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민단체에서 비영리병원으로 운영하라고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익을 가져가지 못한다면 어느 투자자가 투자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원 지사는 “의료 시장이 개방되고 경쟁이 치열해지는 과정에서 기존 의료 종사자들이 저항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미래를 위해 대안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토론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제주=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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