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탄생 100년] "잠 다 자고 어느 세월에 선진국 따라잡나"

입력 2015-10-13 18:14  

멈춰선 한국호, 다시 기업가 정신이다 (2) 정주영의 속도경영
모두 달라붙은 '돌관체제', 반 년 공사 한 달 만에 끝내

조선소 지으며 배 두 척 동시 건조…경부고속도로 2년4개월 만에 완공
빠듯한 공사비에 이익 남기려고 공기 단축 통한 속도경영 체질화
"선진국 기업이 하루 10시간 일하면 우린 20시간·30시간씩 일해야"



[ 박준동 기자 ]
총 길이 428㎞인 경부고속도로 한가운데 자리 잡은 추풍령 휴게소. 서울에서 214㎞ 떨어진 상행선 추풍령 휴게소에는 경부고속도로 기념탑이 서 있다. 기념탑은 ‘세계 고속도로 건설 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이뤄진 길’임을 뽐내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공사는 1968년 3월1일 첫삽을 떠서 1970년 6월27일 끝났다. ‘공사가 수월했으니 2년 반도 안 돼서 끝났겠거니’ 하는 생각은 착각이다.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호 峨山·아산)은 1970년 6월 초 속이 숯처럼 타들어갔다고 자서전 ‘이땅에 태어나서’에서 회고했다.

“다른 구간은 다 됐는데 옥천군과 영동군을 연결하는 당재터널(현재 금강로의 옥천터널) 공사가 문제였다. 절암토사로 된 퇴적층이어서 와르르 무너지기 일쑤였다. 건설부에서 나온 이문옥 박사에게 얼마나 더 걸릴지 물었다. 이 박사는 정상 속도면 내년 3월, 이르면 올 연말이라고 답했다.”

아산은 우선 단양시멘트(현 현대시멘트)에 지시를 내렸다. “일반 시멘트 생산을 중단하고 빨리 굳는 조강 시멘트로 돌리시오.” 당재터널 공사 현장은 돌관(突貫)체제로 바꿨다. 말 그대로 모두 달라붙어 낮밤없이 일하는 방식이다. 작업조를 2개조에서 6개조로 늘리고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에 있던 모든 중장비를 동원했다. 모두들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공사는 거짓말처럼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덕분에 일러야 반 년이 걸린다고 한 공사를 25일 만에 마칠 수 있었다.

“시간은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

아산에게 ‘시간’은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었다. 아산은 기업을 경영한다면 ‘속도경영’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익을 남겨 소득과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 진정한 기업가라고 생각했다. 기업인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거저 돈을 퍼넣는 것은 자선 사업가지 기업가가 아니라고 했다. 공사비가 아무리 빠듯해도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익을 남겨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넉넉지 않은 공사비에 탈법도, 부실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아산은 결국 공사나 생산 일정을 단축하는 방법 외에 이익을 창출하는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정주영식 속도경영’이다.

조선소 지으면서 배 만들다

현대조선소(지금의 현대중공업)를 건설할 때도 이 같은 아산의 원칙이 적용됐다. 당시 8000만달러라는 거금을 투입하는 현대조선소 기공식이 열린 것은 1972년 3월23일. 아산은 14개월 전인 1970년 12월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오나시스의 처남인 그리스 선박왕 리바노스에게 26만t짜리 유조선 두 척을 척당 3905만달러에 수주하고 5년 반 뒤 인도하기로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기공식에서 “임자. 이제 기공식을 여는데 제때 배를 건네줄 수 있겠소”라고 물었다. 아산은 생각이 있었다. 조선소 건설은 조선소 건설이고, 선박 건조는 선박 건조라는 것이다. 조선소를 지으면서 조선소 밖에서 선박을 건조하면 될 것 아닌가.

또다시 돌관 작업에 들어갔다. 다른 공사에서 꼭 필요한 것을 빼고는 그룹의 모든 장비를 투입했다. 매일 2200명이 넘는 인력을 불러들였다. 쇠를 깎고 붙이는 동시에 방파제를 쌓았다. 기계 전기 내장 등에 필요한 인력을 교육하면서 바다를 메우고 도크를 팠다. 아산을 비롯해 모든 임직원이 구두끈도 풀지 않은 채 자고 일했다. 1974년 6월 부지 60만평, 최대 건조능력 70만t, 70만t급 드라이 도크 2기를 갖춘 조선소가 준공됐다. 2년3개월 만에 조선소를 지으면서 동시에 유조선 2척을 건조한 세계 조선사에 유일무이한 기록을 남겼다.


“선진국 따라잡으려면 더 많이 일해야”

현대가 자동차와 건설 등의 사업부??갖추고 어느 정도 기업의 모습을 띤 1960년대 초반 아산의 눈은 이미 해외에 가 있었다. 경쟁 상대도 국내 기업이 아니라 일본과 미국 유럽 등 선진국 기업들이었다. “일본이나 선진국 기업들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우리는 이제 10년, 15년이다. 우리의 두뇌와 능력이 아무리 우수하다고 하더라도 따라잡기 쉽지 않다. 우리가 뛰면 그들도 열심히 뛴다. 다른 나라 기업들이 10시간을 일에 쓴다면 우리는 20시간, 30시간을 일에 쏟아야 한다.”

아산은 이 때문에 자신 스스로 여유 있는 해외 출장을 가 본 적이 거의 없다. “외국 기업들은 회사 일을 위해 출장을 보낼 때도 55세 이상은 사흘 전에, 젊은 사람은 이틀 전에 현지에 도착하도록 시킨다. 시차를 극복해 맑은 머리로 일을 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래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우리는 바로 그날 도착해서 그 길로 상담에 들어가 정신 똑바로 차려 훌륭하고 멋있는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속도경영이 오늘의 한국 일궈

아산의 속도경영은 한국을 폐허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오게 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1485조원으로 1953년 대비 3만1000배 늘었다. 같은 기간 1인당 국민총소득(GNI)도 67달러에서 2만8180달러로 420배 이상 뛰어올랐다. 미국이나 일본, 유럽 주요 국가의 1인당 GNI가 4만달러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제 60~70%까지 왔다. 김주현 현대경제연구원 고문은 “선진국과의 격차를 좁히려면 아산이 강조한 기업가 정신과 속도경영이 지금도 발휘돼야 한다”며 “이것이 가능하려면 재기에 나설 수 있도록 격려하는 사회 문화가 절실하다”고 진洑杉?

한경·울산대 아산리더십연구원 공동기획

■ 특별취재팀=박준동 차장(팀장) 정인설·도병욱·강현우·김순신 산업부 기자 이태명 금융부 기자, 김보형 건설부동산부 기자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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