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보기나 했어?" 아산의 유산은 불가능에 도전한 기업가 정신

입력 2015-10-16 19:37  

멈춰선 한국호, 다시 기업가 정신이다 (1) 인간 정주영, 기업가 정주영


[ 이태명/김범준 기자 ]
지난 8일 울산 방어진 앞바다.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1도크에서는 8만4000㎥급 LPG선 건조가 한창이었다. 나머지 9곳의 도크와 18곳의 안벽(岸壁)도 빈자리가 없었다. 이곳에서 건조 중인 선박은 35척. 일감에 비해 작업장이 비좁게 느껴졌다. 하지만 울산조선소의 망치 소리는 예전 같지 않았다. 지난해부터 불어닥친 위기의 먹구름이 짙어지고 있어서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3조2495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중국에 밀려 수익성이 떨어진 데다 원가를 밑도는 해양플랜트 수주로 고전한 결과다. 올해 사정도 그다지 좋지 않다. 권오갑 현대중공업 사장은 “지금은 한국 조선업 전체가 기로에 서 있다”고 말했다.

43년 전 이곳에는 더 큰 긴장감이 돌았다. 중공업이라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나라, 변변한 기술자도 없는 나라가 조선산업 진출을 선언했으니…. 모두 실패할 것이라고 말할 때, 전기도 안 들어오던 황량한 백사장에 세계 최대 조선소를 짓겠다고 나선 이가 아산(峨山) 정주영이다. 그의 무모한 도전이 조선 수주량 세계 1위국의 신화를 써냈다. 자동차, 해외 건설도 뗏弼≠測? 아산의 도전은 곧 한국 주력 산업의 태동이요 성장사였다.

실패해도 포기는 없다

‘신화를 쓴 기업가’ ‘한국 재계의 거목’으로 평가받지만 정주영의 소싯적 삶은 평범했다. 소학교 졸업이 전부였고, 재력이나 든든한 배경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열여섯 살 때 아버지가 소를 팔아 받은 돈 70원을 들고서 무작정 상경해 공사판 막노동, 쌀가게 점원 등을 전전했다. ‘3포 세대(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로 불리는 지금의 20대보다 못한 처지였다.

자기 사업을 시작한 이후에도 순탄하지 않았다. 여덟 차례의 크고 작은 실패도 맛봤다. 1938년 남에게 물려받아 운영하던 쌀가게는 2년 만에 일제의 배급제 시행으로 문을 닫았고, 지인들과 합작해 세운 자동차정비사업(아도서비스)도 화재 등으로 실패했다. 6·25전쟁 직후 현대건설을 세웠으나 대구 낙동강 고령교 공사 차질로 빚더미에 앉아야 했다. 1968년 일본 기술을 도입해 야심차게 내놓은 현대자동차의 ‘코티나’는 2년 만에 막대한 부실을 남기고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숱한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1965년 태국 빠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가 그랬다. 경험 미숙으로 막대한 손실을 본 끝에 공사를 끝냈지만 이때의 경험을 밑천 삼아 미국 알래스카, 중동 항만공사 등 해외 공사를 잇따라 수주했다. 정진홍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울산대 석좌교수)은 “아산에게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불확실성에 치열하게 도전했던 기업가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불가능? 그게 뭔데…

1966년 여름, 일본 도쿄에 있던 이춘림 현대건설 상무(전 현대중공업 회장)는 아산(당시 현대건설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바쁜 일 없으면 내일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지.” 정 회장이 이 상무를 데리고 간 곳은 요코하마조선소. 한국에서 짓는 배가 고작 1만t이던 시절 요코하마조선소에선 20만t급 선박을 건조하고 있었다. 조선소를 묵묵히 바라보던 정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도 조선소를 세워 외국의 큰 배를 주문받으면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그로부터 8년 뒤인 1974년, 울산 앞바다에 세계 최대 조선소가 건설됐다. “후진국에서 만든 배가 바다에 뜨기는 하겠느냐”는 조롱 속에 시작한 조선소는 2년3개월 만에 지어졌고, 20년 뒤 세계 수주 1위 조선소가 됐다.

정주영의 도전은 늘 이런 식이었다. 한국 건설사 최초의 해외 수주인 태국 고속도로 공사(1964년), 국산 자동차 생산(1975년) 등 아무도 하지 않던 것,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일에 과감히 부딪쳤다.

자원개발 사업도 그랬다. 1978년 현대중공업 계동사옥 14층. “이봐~ 광산을 한자로 써봐.” 정 회장은 주강수 기획실 차장(전 가스공사 사장)을 조용히 집무실로 불러 대뜸 지시했다. 당시 정 회장은 조선 사업에 이어 해외 자원개발 사업에 뛰어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주 차揚?鑛山(광산)이라고 쓰자, 정 회장은 “틀렸어”라며 이렇게 말했다. “광산은 ‘광산(狂山)’이야. 자원개발 한 번 잘못하면 현대그룹도 한 방에 갈 수 있어. 하지만 기간산업 발전을 위해선 꼭 해야 해. 최종 책임은 내가 질 테니 한번 추진해봐.” 그해 말 현대중공업은 호주 드레이튼 유연탄광산 투자에 성공했다. 한국의 해외 자원개발 1호였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그런 정 회장을 가리켜 “스스로 땅을 찾아 말뚝을 박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행동하라”

정주영의 도전은 한국 산업의 주춧돌을 놨다. 1946년 그가 서울 중구 초동 약 660㎡ 터에 세운 현대자동차공업사는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현대백화점·한라·KCC·현대산업개발 등 범(汎)현대그룹을 이룬 ‘씨앗’이었다. 한국의 경제영토도 무한으로 확장시켰다. 1965년 현대건설이 처음 시작한 해외 건설부문에서 한국은 세계 5위(수주액 기준)에 올랐다. 조선산업은 또 어떤가. 1974년 현대중공업이 첫 대형 선박을 건조한 지 20년 만인 1993년 한국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조선 1위 국가가 됐다. 1976년 생산한 최초 국산차 ‘포니’는 세계 5위 자동차 강국의 초석이었다.

정주영을 위시한 수많은 청년 기업가를 배출했던 역동의 한국 경제가 위기를 맞았다는 지적이 많다. 한국 산업계는 1970년대 구축한 조선(정주영), 반도체(이병철), 중화학(구인회), 철강(박태준) 등 기간(基幹)산업의 뒤를 이을 신성장동력을 아직 찾지 못했다. 청년 창업 기업가의 명맥도 끊길 위기다. 돌파구는 없을까.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지금 우리 기업에 필요한 것은 처절한 자기 파괴와 혁신”이라고 했다. 이전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움에 도전하는 정주영식 기업가 정신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머리로 생각만 해서는 기업이 클 수 없다. 우선 행동해야 한다.” 아산이 2015년 위기에 처한 한국 사회에 던지는 조언이다.

○특별취재팀=산업부 박준동 차장(팀장) 정인설· 도병욱·강현우·김순신 기자, 금융부 이태명 기자

울산=글 이태명/사진 김범준 기자 chihir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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