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현우 기자 ]
세계 명품산업의 최대 소비 지역인 아시아, 그중에서도 ‘쇼핑 천국’으로 이름난 홍콩에서는 매년 10월 초 화려한 명품시계 박람회가 열린다. 랑에운트죄네, 보메메르시에, 까르띠에, IWC, 예거르쿨트르, 몽블랑, 파네라이, 피아제, 리차드밀, 로저드뷔, 바쉐론콘스탄틴, 반클리프아펠 등 10여개 브랜드가 참가하는 ‘워치스&원더스(Watches&Wonders)’다. 2만여명이 관람한 올해 행사에서는 유럽의 시계 명가들이 아시아 ‘상위 1%’를 겨냥한 전략상품을 쏟아냈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시계를 사는 사람은 거의 사라졌다. 언제 어디서나 정확한 시각을 알려주는 스마트폰이 있으니까. 더구나 시계업계의 기술력은 이미 충분히 상향 평준화했다. 이제 명품시계 업체들은 기계식 시계만의 ‘가치’와 독창적인 ‘스토리’를 제품에 얼마나 잘 담아내느냐를 놓고 겨루고 있다.
“오늘밤 당신에게 입맞추겠어요(Let me kiss you tonight).” “널 미친듯이 만지고 싶어(I want to caress you madly).” 리차드밀이 내놓은 ‘에로틱 투르비용’은 버튼을 누 ?때마다 문자판이 무작위로 돌며 이런 야릇한 문장을 조합해냈다. 로맨틱한 콘셉트의 이면에는 무브먼트(시계의 핵심 부품인 동력장치)를 기존 시계에 비해 아래로 끌어내려 설계하는 등 고난도 시계 제조 기술이 숨어 있다.
예거르쿨트르의 ‘랑데부 아이비 시크릿’은 언뜻 보면 보석 같지만, 덮개를 열면 시계가 단아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304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시크릿 워치다. 고사양의 기계식 시계를 작게 만드는 데 강한 예거르쿨트르의 명성에 걸맞게 기네스북에 올랐던 초소형 무브먼트를 탑재했다. 스테판 발몽 예거르쿨트르 마케팅 디렉터는 “영원과 충절을 상징하는 아이비에서 영감을 얻었고 시크릿 워치 분야의 오랜 노하우를 결합한 제품”이라고 소개했다.
몽블랑의 ‘빌르레 투르비용 실린더릭 나이트스카이 지오스피어’는 두 개의 작은 지구본을 달아 북반구와 남반구의 낮과 밤 변화를 보여줬다. 1497년 포르투갈을 출발해 인도행 항로 개척에 성공한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의 용기와 추진력을 표현했다고 한다.
까르띠에의 ‘로통드 드 까르띠에 아스트로깔랑데르’는 고급 기능인 퍼페추얼 캘린더(윤달과 윤년까지 인식해 날짜를 정확히 표시하는 기능)를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계단 형태로 층층이 이어진 원형 디스플레이를 통해 월·일·요일을 볼 수 있다. 캐롤 포스티어 까르띠에 무브먼트 크리에이션 수석은 “5년여의 개발을 거쳐 수백개의 부품을 3주 동안 정교하게 조립하는 제품도 있다”며 “디자인의 예술을 보여주는 시계를 만드는 게 우리의 정신”이라고 했다.
반클리프아펠의 ‘레이디 아펠 카디날 카민’은 힘차게 날아오르는 홍관조를 표현했는데, 이를 위해 실제 새의 붉은 깃털을 시계 안에 넣었다. 랑에운트죄네는 창립자 탄생 200년을 맞아 일반 금에 비해 가공이 두 배 이상 까다로운 허니골드 소재를 쓴 ‘1815’ 한정판을 선보였다.
남성적인 이미지를 고수하던 브랜드들이 여성 공략에 관심을 기울이는 현상도 두드러졌다. 투박한 ‘마초 시계’로 유명한 파네라이는 처음으로 연두색 스트랩(시곗줄)을 장착한 ‘라디오미르 1940 3데이즈 아치아이오’를 내놨다. 색상이 알록달록해진 것은 물론 두께도 얇게 바꿔 여자들이 편안하게 찰 수 있도록 했다. IWC도 기계식 시계에 관심을 갖는 여성을 겨냥해 라즈베리 핑크, 녹색, 청색 등의 스트랩을 두른 ‘포르토피노 37’ 신작을 출시했다.
홍콩=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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