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18세기, 조선의 美 달항아리
(33) 정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34) 왕의 아버지가 정치를 대신하다
(36) 이 땅의 주인은 농민이다
(37) 제국을 선포하다
1884년 음력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저녁 7시 종로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에서 이 낙성식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가 개최됩니다. 당시 실세였던 민씨 세력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민영익부터 청을 위해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에 간섭하던 묄렌도르프 등이 대거 이 연회에 참여하였지요. 연회가 시작되자마자 곧 창문밖으로 불이 난 광경이 포착됩니다. 사람들은 불이야 불이야 라고 소리지르고 있었지요. 놀란 민영익은 우정국 문을 박차고 나갔지만 곧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옵니다. 급진 개화파가 주축이 된 개화당의 칼에 맞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 국가를 지향한 사건, 바로 갑신정변의 시작이었습니다.
조선을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겠다는 김옥균
제가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정변의 핵심 인물인 김옥균이 남긴 말입니다. 그는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개화당)는 우리나라를 아시아의 불란서(프랑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이 영국의 17세기의 명예혁명처럼 왕정을 유지하면서도 근대 입헌 체제로 나아가는 것에 비교하여 우리나라는 프랑스혁명처럼 근대 국민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김옥균은 명확하게 당시 세계 정세와 역사의 흐름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혁명처럼, 근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기득권 세력과 구체제를 강한 의지로 밀어부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조선은 1876년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으로 근대 경제 체제, 즉 자유 무역이라는 틀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제 어떻게 정치적 근대 개혁을 할 것이냐는 상황이었지요. 안으로는 신분제와 토지 문제 등 여전히 봉건적 걸림돌이 백성들의 삶을 누르고 있었고 밖으로는 서구는 물론 먼저 근대화한 일본과 청 모두 조선을 가만놔두지 않는 상황을 타개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3일 천하, 그리고 근대 국가 체제의 개혁 모색
사실 이러한 상황을 당시 지배층은 누구나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었지요. 고종은 물론 권력을 쥐고 있던 민씨 세력, 그리고 우리 내부에서 통상과 근대화를 주장한 일명 개화파 세력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제대로 이를 실현해 낼 수 있느냐는 점에서 서로의 생각이 너무나 달랐다는 것이지요. 특히 김옥균을 비롯, 왕 ?유지와 동시에 내각책임제적 정치 체제를 지향하였던 개화파는 당시 민씨 세력이 오히려 청나라에게 너무나 쉽게 종속되는 것 아니냐며 매우 크게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며 내정 간섭을 일삼는 것에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 세력은 확실한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1884년 음력 10월 17일부터 3일간의 갑신정변으로 구체화된 것입니다. 당시 청나라 군사 절반이 베트남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파견되었고, 일본 공사의 정변 지원 약속이 있었기에 김옥균은 자신에 차 있었습니다. 심지어 정변 5일전 고종과 독대한 김옥균은 “국가의 명운이 위급할 때 모든 조처를 경의 지모에 맡기겠소”라는 조금은 추상적이고 애매하지만 국왕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1884년 음력 10월 17일 민영익을 시작으로 조영하, 민태호 등 개화당의 시각으로 보수 기득권 세력이라고 여겨진 이들을 처단하게 됩니다. 다음날에는 고종의 사촌형 이재원을 영의정으로 하고, 나머지 주요 요직은 급진개화파가 차지하는 새 내각을 발표합니다. 홍영식은 좌의정, 박영효는 군사력을 담당하는 전후영사에 그리고 김옥균은 호조참판이 되지요. 눈여겨볼 점은 김옥균이 국가 재정의 실세인 호조참판 자리에 스스로를 임명했다는 것입니다. 근대화의 성공여부가 안정적인 재정 정책에 달려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리고 격론 끝에 마지막 3일째 국가의 혁신을 위한 정강 14개조를 발표하게 됩니다.
청에 대한 조공 폐지와 인민평등권을 내세운 혁신 정강 14개조
이 14개조는 갑신정변을 일 매?김옥균 등이 지향한 근대적 국가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얼굴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1조에서 흥미롭게도 흥선대원군의 조속한 귀국과 청에 대한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을 천명합니다. 개화파는 우선 뭐니뭐니 해도 자주 독립 국가의 위상을 지녀야 근대적 개혁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지요. 그래서 임오군란 때 청으로 압송된 흥선대원군의 귀국을 요구하며 청에 대등한 국가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일본의 도움을 무리하게 바라면서까지 김옥균이 원했던 대외적 국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도 합니다. 한편 대내적으로는 2조에서 문벌 폐지와 인민 평등권 제정을 내세웁니다. 스스로 양반의 자제이자 지배층이면서도 과감하게 신분제의 모순을 철폐하려는 김옥균의 의지가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조에서는 대신과 참찬이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 반포한다는 조항을 넣어 아직 서구식 의회와 내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근대적 정치 제도의 요소를 나름대로 구현해 보려 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갑신정변이 내각책임제를 지향했다고 보는 근거이기도 하지요. 한편 가장 논쟁적인 조항은 3조로 토지세에 대한 개혁과 탐관 오리의 부정을 막을 것을 천명하지만 당시 다수 농민이 원하는 근본적인 토지 개혁이 아니라고 보는 역사가들이 대다수입니다.
이러한 정강도 3일째인 음력 10월 19일(양력 12월 6일) 오후부터 청군이 들이닥치고 승기를 잡자 일본군과 일본공사가 허겁지겁 철수하면서 물거품이 되어 버립니다. 일본공사는 약속을 뒤집은 채 인천으로 도망갔으며, 고종은 정변의 조치를 모두 무효라고 선언하였으며 급진개화파는 청군에 죽임을 당하거나 체포령을 피해 망명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핵심 인물인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1894년 온건개화파 출신의 홍종우에 의해 암살되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결국 최초의 근대적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였던 갑신정변은 3일만에 실패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한경닷컴 바로가기] [스내커] [슈퍼개미] [한경+ 구독신청]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