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석 기자 ] 지난 12일 ‘워킹 데드’라는 미국 드라마가 새 시즌을 시작했다. 벌써 여섯 번째다. 2010년 등장한 뒤 매년 쉬지 않고 미국인의 안방을 찾고 있다. 미국과 동시에 국내 케이블TV에서도 방영될 만큼 국내 팬층 역시 두텁다.
워킹 데드는 이름 그대로 ‘걸어다니는 시체들’, 즉 ‘좀비’ 얘기다. 지난여름엔 ‘피어 더 워킹 데드’라는 ‘자매품(스핀 오프)’까지 나왔다. 좀비 드라마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올초 ‘아이 좀비’라는 유사 드라마가 전파를 탔고, 지난 9월에는 ‘Z네이션’이라는 좀비물이 시즌 2를 시작했다.
영화계에서도 좀비 인기는 꾸준하다. ‘나는 전설이다’, ‘월드워Z’ 등의 좀비물이 잊을 만하면 극장에 걸리고, ‘레지던트 이블’이라는 영화는 6편까지 제작되기도 했다. “좀비가 나오는 모든 영화·드라마의 3분의 1 이상은 최근 10년 새 나왔다”(대니얼 드레즈너 미국 터프트대 교수)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로 요즘 들어 좀비의 등장 빈도가 잦다. 가히 좀비 전성시대다.
한국으로 건너온 ‘좀비’
좀비의 고향은 서인도 제도의 섬나라 아이티다. 이 지역 토속 종교인 부두교 전설에 나오는 ‘주술에 의해 움직이는 시체’가 기원이다. 좀비는 아이티에서 미국 대중문화계를 거쳐 최근엔 한국으로 건너왔다. 이번엔 산업계와 금융계에 둥지를 틀었다. 통칭 ‘좀비기업’으로 불린다. 자체 능력으론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고, 정부나 은행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명을 이어가는 기업을 말한다. 정식 명칭은 ‘한계기업’이다.
최근 부쩍 수가 늘었다. 한국은행이 발간한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3년 이상 영업이익이 이자비용을 밑돈 부실 기업은 2009년 2698개에서 작년엔 3295개로 증가했다. 12월 결산 비금융 외감법인 2만여곳 가운데 30% 이상이 좀비기업이라는 흉흉한 데이터도 돌아다닌다. 이달 들어 ‘산업경쟁력 강화 및 구조조정 협의체’라는 범정부 차원의 좀비기업 퇴치 조직까지 출범한 이유다.
머뭇거리면 잡아먹힌다
좀비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띤다. 우선 좀비는 사람의 피와 살을 원한다. ‘두뇌 파괴’라는 가장 매정하고 잔인한 방법으로만 박멸된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마지막으로 좀비에게 물린 인간은 누구든 반드시 좀비가 된다. 한국에서 유행 중인 ‘좀비기업’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의 피땀인 세금을 먹고 살고, ‘구조조정’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고는 폐해가 없어지지 않으며, 전염성이 강해 멀쩡한 다른 기업까지 망가뜨린다.
좀비기업과 일반 기업을 가르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한 해 동안 기업이 벌어 湧?돈(영업이익)과 그 해에 갚아야 할 이자를 비교하는 ‘이자보상배율’이라는 잣대를 활용한다. 하지만 모호한 구석이 있다. ‘에라 모르겠다’고 무조건 손을 댈 수도 없다. 좀비기업 내 종사자들의 삶이 중첩되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이라는 칼날이 무뎌지는 요인이다.
좀비 드라마의 등장인물들도 항상 비슷한 상황에 직면한다. 감염 초기의 좀비는 정상적인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가족 친구 등의 얼굴을 하고 있다. 주인공은 결국 칼을 쥔 손의 힘을 푼다. 그리고 사태를 악화시킨다. 좀비 영화나 드라마의 교훈은 단순하다. “머뭇거리면 잡아 먹힌다.”
안재석 경제부 차장 yag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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