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학 로고프 교수도 '피케티-디턴 불평등론' 대척점서 비교
[ 뉴욕=이심기 기자 ]
‘위대한 탈출’ 국내 번역 출간 전 피케티 ‘21세기 자본’과 비교 기고
닛케이도 두 사람 분석 서평 실어
디턴 “불평등은 성장 위한 인센티브…그러나 성장 질식시킬 수도 있어”
‘한겨레’는 불평등의 부정적 측면만 부각
‘성장 위한 인센티브’ 강조한 한경이 왜곡?
디턴 저서에 관한 서평·기사 공통점은 가난 탈출하게 한 성장 순기능에 ‘방점’
불평등의 부작용 경계 지적도
“앵거스 디턴의 책을 보면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평등해졌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지난해 5월8일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가 저명학자들의 기고문을 전문으로 싣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에 올린 글 가운데 한 대목이다. 로고프 교수는 당시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의 저서 《21세기 자본》이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그보다 먼저 출간된 앵거스 디턴 프린스턴대 교수의 저서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을 대비시켜 거론했다.
○로고프 교수도 피케티와 디턴 비교
글의 제목은 ‘불평등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다. 로고프 교수의 글을 요약하면 이렇다. 외신전문 번역사이트 ‘뉴스페퍼민트’가 당시 번역한 로고프 교수의 기고문 내용을 이름 표기만 바꾸고 그대로 옮긴다. 원문도 확인했다.
“토마 피케티의 영향력 있는 책 《21세기 자본》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현재 목격하고 있는 불평등이 중세의 노상 강도 귀족(Robber barons)이나 왕정시대 이후에 처음 경험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런 결론은 어찌 보면 이상한데 왜냐하면 최근에 나온 다른 훌륭한 책인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을 읽고 난 뒤에는 세계가 그 어느 때보다 평등해졌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견해가 맞을까? 정답은 바로 당신이 각 국가를 하나씩 살펴보느냐 아니면 세계 전체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디턴의 책을 관통하고 있는 사실은 바로 지난 몇십년간 개발도상국에 있는 수십억명-주로 아시아지역-이 극심한 수준의 빈곤으로부터 탈출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불평등을 증가시킨 요인이 다른 국가에서는 수십억명에게 더 공평한 기회를 제공했다.”
디턴 교수 스스로는 자신의 저서가 피케티 교수의 《21세기 자본》과 대척점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한경BP가 《위대한 탈출》을 번역 출간하기 이전부터 독자들-석학으로 불리는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조차-은 두 개의 책을 비교선상에 올려놓고 있었다. 로고프 교수의 글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경제 성장보다 불평등이 더 중요하다는 피케티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개발도상국에 있는 많은 사람이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전히 선진국의 경제 성장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21세기가 해결해야 할 첫 번째 문제는 여전히 아프리카와 다른 개발도상국에서 빈곤으로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상위 0.1%의 사람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세계적 불평등을 줄이는 데 자본주의가 지난 30년간 놀라운 성과를 이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피케티와 디턴 비교
로고프 교수가 절대적 빈곤과 불평등을 착각한 것이라는 비판과 함께 개인적 해석일 뿐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럴까?
“불평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피케티와 디턴 누구를 찾아야 할까, 아니면 둘 다?”
지난해 6월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영어판 잡지인 닛케이아시안리뷰에 올라온 글의 제목이다. 아래는 글의 일부다.
“소득 불평등이 자기 영속적(self-perpetuating)이라는 피케티의 중심 논지는 지난해 인류가 빈곤과 조기사망에 맞서 이뤄온 발전의 역사를 다룬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에서 다뤘다. 디턴은 불평등이 진보의 결과며, 모든 사람이 동시에 부자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글은 피케티와 디턴의 공통점과 함께 차이를 분석했다. 불평등이 지속적으로 확산됐다는 피케티의 주장은 단순한 논리며, 일부는 과장됐지만 시대정신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디턴에 대해서는 소득 외에 건강과 교육의 획기적이고 전반적인 개선을 통해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해졌다고 주장했으며, 더 나은 인류의 삶을 위해 기회의 평등이 보장돼야 함을 강조했다고 언급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스티븐 그랜빌 전 호주 중앙은행 부총재다.
이처럼 지난해 피케티와 디턴을 비교한 기사와 서평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경제신문이 피케티 열풍을 잠재우기 위해 디턴을 억지로 피케티에 끌어다붙였다는 한겨레신문사 부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김공회 연구위원의 주장이 오히려 왜곡에 가깝다.
○불평등이 성장을 질식?
“만약 당신이 인류 복지가 어떻게 향상돼왔는지를 알고 싶다면 《위대한 탈출》을 읽어야 한다.”
디턴 교수의 《위대한 탈출》에 대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의 서평이다. 프린스턴대 출판부가 홈페이지에 이 책을 소개하면서 올린 첫 번째 리뷰다.
지난해 9월 한국경제신문은 디턴 교수를 직접 인터뷰했다. 당시 1면 기사다.
“앵거스 디턴 미 프린스턴대 교수는 ‘불평등은 성장의 인센티브며, 경제를 성장시키고 삶을 개선시킨다’고 말했다.
디턴 교수는 저서 《위대한 탈출》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인간의 삶은 성장을 통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성장은 빈곤과 결핍에서 인간을 탈출시키는 원동력’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불평등은 성장의 결과면서 동시에 또 다른 성장과 진보를 이끌어낸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만 ‘경제적 불평등이 정치적 불평등으로 이어져 소득이 낮은 사람들이 가난과 질병에서 탈출하 ?못하도록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경제신문은 당시 이 기사의 제목을 ‘불평등은 경제 성장의 인센티브’로 뽑았다.
또 다른 글을 보자.
“모든 분별 있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는 친성장(pro-growth)론자다. 그러나 무조건 성장이 좋다는 건 아니다. 불평등은 성장의 부산물일 수도 있고, 성장을 위한 인센티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불평등)은 성장을 질식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장단점에 적절한 균형을 맞춰주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다.”
이 글은 김 연구위원이 디턴 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내 답변을 받은 내용이라며 지난달 31일자 한겨레신문에 쓴 글의 일부다. 기사에 ‘성장을 위한 인센티브’라는, 한국경제신문이 13개월 전에 쓴 표현이 그대로 들어 있다. 한겨레신문은 이 기사의 제목을 ‘불평등은 성장을 질식시킬 수도 있다’고 뽑았다. 한경은 불평등을 강조한 제목을 뽑지 않았으니 디턴을 왜곡했다는 것인가.
디턴 교수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직후 미국기업연구소(AEI)의 칼럼니스트 제임스 페소코키스는 디턴 교수에 대한 헌사로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경제 성장은 빈곤과 물질적 결핍에서 탈출하는 엔진(동력원)이다. 하지만 부유한 세계에서 성장이 흔들리고 있다. 근래 10년마다의 성장이 그전 10년에 비해 낮아졌다. 거의 모든 곳에서 성장의 흔들림이 불평등의 확장과 함께 왔다.”
AEI가 대기업과 보수주의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AEI도 디턴 교수를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일까. ‘아쉽게도’ AEI 칼럼니스트 ?쓴 헌사는 디턴 교수의 저서 《위대한 탈출》에 있는 문장을 그대로 인용했다.
한경BP는 디턴을 성장주의자로 둔갑시키기 위해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김공회 연구위원의 표현대로 ‘체계적으로 용의주도하게’ 왜곡시켰을까.
한경BP의 번역판에는 다음 내용도 생략됐다. “불평등은 성장의 산물이다. 모든 사람이 동시에 부자가 될 수 없다. 또 모든 이가 깨끗한 물, 백신 등 생명을 구하는 수단들을 즉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불평등은 차례로 발전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좋은 것일 수도 있다. 인도의 아이들은 배움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을 보고 학교에 간다. 그러나 승자가 다른 이들이 따라오는 것을 막고, 사다리를 치워버린다면 불평등은 나쁜 것이 된다.”
‘불평등은 발전의 결과, 즉 성장의 산물’이라는 디턴 교수의 핵심 메시지도 누락된 것이다. 한경BP의 번역 과정에서 생략된 부분이 단순한 축약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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