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배당이 투기성 단기투자 키워
[ 한민수 기자 ]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국내 주요 대기업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부분 '그룹 회장'이라고 답할 겁니다.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식을 갖고 있는 주주 모두인데, 이것이 한국 주식회사의 현실인 것이죠."
7년간 자본시장연구원장을 지낸 최운열 서강대 명예교수의 말이다. 주주(株主)는 주식(株)회사의 주인(主)이다. 그러나 주식 시장에 상장된 한국 기업들은 정말 주주를 위한 회사인지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주주 및 그 일가에 집중된 지배구조와 낮은 배당 등이 주주들을 투기성 단기투자로 내몰고 있다. 한국 증시에서 '주주'가 '투자자'로 읽히는 이유다. 건전한 투자와 기업 성장의 과실을 함께 누린다는 확신을 위해서는 한국 특유의 기형적이고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다.
◆ 쥐꼬리 배당에 '코리아 디스카운트'
한국은 기업들이 배당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나라다. 한국 상장사의 배당성향(순이익 중 현금배당 비율)의 세계 최하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2014년 모간스탠리캐피탈인터내셔널(MSCI)지수에 포함된 45개국의 평균 배당성향은 45.4%였다. 지난해 연간 순이익이 100억원이었다면, 이 중 절반에 가까운 45억원을 주주들에게 나눠줬다는 것이다. 국가별로 뉴질랜드가 76.1%로 가장 높았고 영국 51.6%, 독일 38.4%, 미국 32.3%, 일본 27.9% 등이었다.
한국은 11.7%를 기록해 45개국 중 44위를 차지했다. 한국과 같이 신흥국에 속하는 대만과 중국도 30~40%대로 이보다 높았다.
낮은 배당성향은 한국 증시의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불러오고 있다. 지난달 22일 현재 MSCI 12개월 선행 예상실적 기준으로 코스피지수의 주가수익비율(PER)은 10.8배다. 이는 미국의 16.4배는 물론 같은 신흥국인 대만과 태국의 12.0배, 13.1배보다 낮다.
변준호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배당이나 자사주 소각을 하지 않고 현금을 쌓아두다 보니 한국 상장사들의 평균 자기자본이익률(ROE)은 8%에 불과하다"며 "배당과 자사주 소각에 적극적인 미국의 경우 15~18%까지 나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 증시의 디스카운트(할인)는 당연한 결과"라고 말했다.
일본은 기업들이 배당을 확대한 이후 외국인들의 투자가 증가했다. 일본 상장사들의 배당액은 1999년에 2596억엔에 불과했으나 지난해에는 7조4493억원으로 증가했다. 배당을 실시한 기업수도 1999년 98곳에서 지난해 1937곳으로 늘었다. 이 기간 일본 상장사의 외국인 보유지분은 7%에서 15%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특히 기업들의 배당 확대로 배당수익률에 기반을 둔 연기금과 보험 등의 장기 주식투자가 늘어나게 된다면 한국 증시의 질적 도약은 물론, 개인들도 은퇴 후 소득원으로 주식투자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 5% 미만 지분에 지배당한 삼성전자
한국의 유독 낮은 배당성향은 지배구조와 관련이 있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적은 지분으로 기업을 지배하고 있다보니, 굳이 배당을 늘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배당을 많이 하게 되면 이익의 많은 부분이 기업 외부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배당을 하지 않고 현금으로 가지고 있으면 주요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를 장악한 총수일가가 이 돈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자타공인 한국 1위 기업인 삼성전자의 경우 총수일가가 보유한 지분은 6월말 기준 4.69%에 불과하다. 지난 22일 기준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을 감안하면 약 9조원 남짓으로 190조원 규모의 회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순환출자다.
순환출자란 대기업 계열사간에 A사는 B사에, B사는 C사에, C사는 다시 A사에 출자하는 형태의 지배구조다. 계열사들이 각 기업의 자금으로 서로를 지배하게 만들고, 총수일가는 최상위 회사만을 적은 지분으로 지배해 그룹 전체를 장악하는 방식이다.
이건희 회장 일가는 자신들이 가진 4.69%의 지분 외에 삼성물산 삼성생명 삼성화재 등 특수관계인 출자로 우호지분을 17.64%까지 확대해 가지고 있다.
최근 국적 논란이 일었던 롯데도 총수일가가 계열사들의 순환출자 구조로 그룹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다. '형제의 난'으로 신동빈 회장이 지배구조 개선작업에 나서기 전 롯데그룹의 순환출자 고리는 무려 417개에 달했다.
최근 지배구조 개편이 국내 자본시장에 화두로 떠올랐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국내 자산총액 순위 기준 15개 대기업 집단 내서 지주사로 전환한 곳은 SK LG GS 한진 두산 CJ 등 6개에 불과하다. 이들 그룹을 제외한 9개 그룹은 여전히 지주사로 전환하지 않은 상태며, 대부분 순환출자 형태의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CGA)에서 발표한 2014년 한국의 지배구조 수준은 태국 말레이시아 대만 인도 등에도 뒤진 아시아 11개국 중 8위다. ACGA에 따르면 기업들이 좋은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고 평가된 상위 절반 국가의 증시는 나머지보다 주가수준이 19% 높았다. 상위 국가들은 더 높은 배당성향과 배당수익률을 나타내고 있었다.
◆ 기관투자자의 적극적 움직임 필요…"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시급"
기업들의 지배구조 개선과 배당 확대, 이에 따른 한국 증시의 구조적 성장을 위해서는 기관 투자자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
롯데그룹의 가족간 경영권 분쟁은 한국 기업 지배구조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복잡한 순환출자, 가족 회의로 정해지는 후진적 의사결정 시스템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의 주식회사들은 이사회가 있음에도 기업경영의 중요한 결정들이 총수일가의 의지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기업의 의사결정은 회사가치 제고보다 총수일가의 사적인 이익을 우선시할 개연성이 높다.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반대하며 공략한 지점도 바로 여기다.
정재규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배주주나 총수일가가 기업 성장의 과실을 독식하는 것을 제동할 필요가 있다"며 "의사결정 구조의 개선을 위해서는 이사회의 주주대표성 확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사회가 특정주주에게 치우치지 않고, 전체 주주의 의견을 고르게 대변할 수 있도록 구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권한과 책임은 연기금을 포함한 기관 투자자에게 있다고 봤다.
개인 투자자가 주주총회 등을 통해 의견을 제시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기관의 경우 지분 투자자라는 명분과 함께 고객의 돈을 관리하는 수탁자로서의 의무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기관들이 기업들과 얽혀있는 사업 관계 때문에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를 감안하면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 도입이 시급하다. 임종룡 금융위원장도 앞선 국감에서 연내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를 마련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국감 이후 관련 태스크포스팀(TF)의 전체 회의는 아직까지 소집되지 않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의 주주총회 의결권 행사 지침을 제시해 책임있는 투자를 끌어내도록 하는 '기관투자가의 주주권 행사 준칙(행동강령)'이다. 법적 강제력은 없지만 각 기관에 준칙 준수를 요청하고, 준수하지 못하면 이유를 설명하도록 해 사실상 강제력을 가진다.
정 연구위원은 "스튜어드십 코드는 한국 자본시장 전체의 신뢰성을 높여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줄이는 요인이 될 것"이라며 "기관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위해 빨리 도입돼야 한다"고 했다.
또 회사와 주주간의 원활한 의사소통 채널이 필요하다고 봤다. 이를 통해 주주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준다면 다양한 이해 관계의 주주들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회사 발전에 기여할 것이란 판단이다. 외국계 헤지펀드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도 국내 투자자들을 든든한 아군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한민수/박희진/박상재 한경닷컴 기자 hm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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