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헤게모니 체제…현대자동차와 갤럭시폰에 일본시장
닫혀있는 동안 한일관계 정상화도 멀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묻고 있는 것은 한국의 국가 정향이다. 한국은 대륙에 속한 국가인가, 해양에 속한 국가인가. 두말할 필요 없이 해양국가였던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식민지 한국이 해양세력 미국에 의해 해방된 것은 우연이었지만 큰 축복이었다. 옛 소련과 북한을 생각하면 이는 너무도 명백하다. 한국의 대륙국가론, 다시 말해 오늘의 친중노선은 통일외교라는 면에서만 정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아직은 모험주의로 보일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친중노선에는 통일에 대한 중국 측의 그 어떤 공개적인 보증도 약속도 첨부돼 있지 않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후진타오로부터 받았다는 약속도 지금은 의심스럽다. 그렇다고 박 대통령이 시진핑으로부터 새로운 약속을 재확인 받은 것 같지도 않다.
TPP는 예상보다 강력한 동맹 체제다. 주말에 밝혀진 ‘거시정책 공동성명’은 더욱 그렇다. 무역과 환율을 둘러싼 높은 수준의 헤게모니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헤게모니는 미국의 보호와 그것에 대한 가맹국들의 신뢰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다. TPP는 일본이 처음 제안할 때만해도 별것 아닌 것처럼 보였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때늦은 대응처럼 보였던 게 사실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한·미 FTA 효과를 극대화하는 지연 작전이 필요했고…. 한국이 2017년부터 수입하기로 한 셰일가스 도입 계약만 해도 그랬다. 이명박 정권은 하는데 왜 아베 정권은 안 되는지를 일본 언론은 따져 묻던 중이었다. 그런 흐름은 역전됐다.
셰일가스는 미국이 동맹국들에 주는 특혜였기 때문에 FTA가 없는 일본은 수입이 불가능했다. 아베는 그러나 TPP를 매개로 일본 총수요의 30%를 셰일가스로 충당하는 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한달음에 태평양 12개 국가를 묶어 TPP까지 이끌어냈다. 미국으로 볼 때는 태평양 전략(pivot to Asia)의 재구축이요, 명백한 중국 견제다. 남중국해는 베트남 브루나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의 공동 안마당이다. 필리핀이 가세하게 되면 소위 중국 측 9단선은 중국에 대한 포위의 9단선으로 바뀌게 된다.
미국은 일본을 감싸안고, 한국은 일본과 멀어진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은 자연스런 면도 있다. 동북아 분업구조는 일본→한국→중국으로 흘렀다. 일본은 한국에 대해 무역흑자이며, 한국은 중국에 대해 흑자다. 미국을 국제 경제의 규칙 제정자로 만든 것은 미 해병대가 아니라 미국의 거대한 무역적자다. 무언가를 구매해주는 힘 즉, 적자를 견뎌내는 힘이 규칙을 만들어 낸다. 로마도 대영제국도 중국도 그랬다. 중국은 더구나 인플레 통화 즉, 은화를 썼어야 할 정도로 무역적자에 시달렸다.
한국이 일본에 큰소리를 치고, 중국에 약세인 것도 무역구조 때문이다. 물론 2000년 약소국의 추억이나 근대의 기억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천적인 힘은 ‘사주는 힘’이다. 중국의 욕구가 패권적으로 보이는 것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개도국이 외교에서 큰소리까지 쳐보겠다는 노골적 욕망을 숨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지금의 무역구조가 지속된다면 한·일 관계 회복은 어렵다.
한국의 대일 무역적자는 지금도 200억달러다. 중국에 대해서는 한국 측의 400억~600억달러 흑자다. 그래서 중국이 기침을 하면 한국이 괴로워진다. 그게 돈의 힘이다.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5000억달러를 벌어가는 것이 미국 파워의 원천이다. 오바마는 “중국 같은 나라가 글로벌 경제규칙을 쓰도록 할 수는 없다”고 TPP 성명서에서 굳이 강조했다. 그게 패권의 본질이다.
현대자동차가 일본에서 안 팔리는 동안, 그리고 갤럭시가 일본 소비자들에게 거부당하는 동안 일본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두 나라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일본이 경쟁 전략을 통해 한국을 컨트롤할 수는 없다. 지금 일본 외교의 한계는 이 지점이다. 일본 시장의 대대적인 개방 없이 일본은 한국을 끌어들일 수 없다. 일본은 한국의 흑자를 만들어 내고 보장해야 한다. 그게 일본이 정상국가로 가는 지름길이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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