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 등에 의존하지 않는 기업 경쟁력 확보 필요
경제는 기업이 하는 것…정부는 '멍석'만 깔아줘야
구조조정은 시장에 맡겨 금융회사가 하는게 바람직
국회보면 답답…FTA 등 협상에선 양보하는 것도 있어야
[ 서욱진 / 김순신 기자 ]
서울 삼성동 트레이드타워에 있는 집무실에 들어서자 김인호 한국무역협회장(73)은 대뜸 책 한 권부터 건넸다. 제목은 《길을 두고 왜 길 아닌 데로 가나》였다. 수출 부진의 해법을 물으러 간 기자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2010년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 자격으로 출간한 책”이라고 설명했다. 얼핏 산업과 금융 등 모든 경제정책은 시장 원리에 맞아야 한다는 그의 지론이 담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는 “걱정해야 할 것은 수출 부진이 아니다”고 했다. “수출 부진을 초래하는 산업 경쟁력 저하가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산업 경쟁력을 높이려면 기업이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는 해법도 내놨다. “올해 무역액이 1조 玭??못 미치게 된 걸 걱정할 게 아니라,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시장 경제환경을 조성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김 회장에게서 한국 무역에 대해 들었다.
▷경제기획원을 거쳐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까지 거시경제정책을 주로 다뤘습니다. 일선 수출 현장을 직접 겪어 보니 어떻습니까.
“1997년 11월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끝으로 지난 18년간 민간 연구원에만 있었습니다. 올 2월부터 무역협회장을 맡아 많은 현장을 찾고 기업인들을 만났습니다. 한국은 물론 다른 나라 기업들도 해외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정말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더군요.”
▷정부는 무역액이 1조달러를 넘은 것을 기념해 무역의 날을 11월30일에서 12월5일로 변경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수출 부진으로 무역 1조달러 달성이 어렵다고 합니다.
“올 들어 수출이 10개월 연속 감소했습니다. 지난달까지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7.6% 줄었고요. 특히 지난달 수출이 15.8% 급감하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수출이 부진하다 보니 수입도 줄어 2011년부터 이어오던 무역 1조달러 달성이 아쉽지만 올해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업종별 수출은 어떻습니까.
“철강 수출은 중국산 제품의 공세로 올 들어 지난달까지 13.1% 감소했습니다. 선박 역시 5.3% 줄었고요. 국제 유가가 작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석유제품과 석유화학 수출이 각각 37.3%, 21.7% 급감했습니다. 자동차도 5.8% 감소했습니다. 경쟁력을 갖춘 휴대폰과 반도체만 각각 8.4%와 3.7% 증가했습니다.”
▷수출이 줄어드는 것이 중국의 경기 침체 등 대외 요인 때문인지, 제품 경쟁력 자체가 떨어지고 있어서인지 궁금합니다.
“세계 경기가 전반적으로 부진합니다. 특히 한국의 최대 수출국인 중국의 성장률이 둔화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생산에 필요한 중간재를 한국에서 많이 수입했는데, 지금은 직접 제조하는 쪽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제품 경쟁력은 업종마다 다르겠지만, 철강 조선 등의 업종은 환율 등에만 기댄 채 자체 경쟁력 강화에 소홀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수출을 늘리기 위한 묘안이 있습니까.
“과거처럼 해외 설명회를 열고, 바이어를 초청하는 노력만으로 수출을 늘릴 수는 없습니다. 세계가 한 시장이 된 지금은 좀 더 크게 봐야 합니다. 다들 어렵다고 하는데 휴대폰과 반도체는 어떻게 수출이 늘었을까요. 산업 경쟁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산업을 이루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기업입니다. 삼성전자 같은 기업이 있기 때문에 불황에도 수출이 늘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출을 늘리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기업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수출을 걱정할 게 아니라 기업을 걱정 해야겠습니다.
“맞습니다. 지금은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세계 경기가 너무 나빴다든지, 환율이 도와주지 않았다든지 등의 외부 요인을 들먹이기 전에 근본적인 기업 경쟁력부터 따져봐야 합니다. 또 정부와 국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기업 스스로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등도 살펴봐야 합니다.”
▷정부가 너무 뒷짐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경제는 기업이 하는 것이지 정부가 하는 게 아닙니다. 정부가 기업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정부 역할은 기업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각종 제도와 사회 인프라 즉 ‘멍석’을 깔아주는 것에서 끝나야 합니다. 과도한 기대도 금물입니다. 기업은 지켜야 할 법을 지키면서 내야 할 세금만 잘 내면 경제에 플러스입니다. 그 이상을 요구하면 안 됩니다. 기업인은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도덕군자도 아닙니다.”
▷철강 조선 해운 등의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구조조정에서도 정부는 큰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에 그쳐야 합니다. 구조조정이 시장의 힘에 의해서 이뤄지도록 놔둬야 합니다. 물론 정부는 단기적인 파장과 산업 경쟁력 등을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기업의 생사는 시장에서, 금융회사가 결정하도록 맡겨 두는 것이 옳습니다. 정부가 직접 개입해서 구조조정을 하면 시장은 죽어 버립니다. 그러면 다시 정부가 개입해야 하고…. 정부가 끊임없이 개입하는 악순환이 올 수 있습니다.”
▷정부보다 정치권이 더 문제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요즘 국회를 보면 많이 답답합니다. 노동개혁은 물론이고 기업구조조정촉진법, 기업활력제고특별법(원샷법) 등 많은 경제법안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은 왜 비준이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게 협상 都求? 일방적으로 한국만 유리하게 가져간다면 중국은 왜 FTA를 하겠습니까. 물론 국회는 국민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지만, 상대가 있는 협상에서 우리 입장만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경쟁력을 기르려면 아무래도 기업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저는 기업가 정신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지금은 과거 산업화 시대의 사명감 같은 기업가 정신만으로는 부족하죠. 세계 경제의 변화와 흐름을 꿰뚫어보는 눈이 있어야 제대로 기업을 이끌 수 있어요. 경기 침체 속에서도 몇백%씩 수출을 늘린 중소기업이 있지 않습니까. 글로벌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고 봅니다.”
▷내년이면 무역협회 설립 70주년이 되는데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까.
“올해는 세계 무역구조 변화에 선제 대응하는 데 역점을 뒀습니다. 내년에는 어떤 분야로 가야 하는지를 좀 더 파고들 계획입니다. 정보통신기술(ICT)이나 사물인터넷(IoT) 기반의 신산업 구조 개편을 위해 정부의 정책과 제도 개선을 이끌어내는 데 힘쓸 겁니다.”
▷경제수석 시절 모셨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했습니다.
“탁월한 지도자였습니다.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개혁을 했지요. 건강이 나쁘지 않아 보였는데 갑자기 서거해 안타깝습니다.”
■ 김인호 무역협회장은…
정통 관료 출신으로 외환위기의 굴곡을 겪었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1967년 1월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공직에 입문해 물가정책국장, 경제기획 뮌? 차관보, 대외경제조정실장 등을 지냈다. 1992년 경제기획원을 떠나 환경처 차관과 한국소비자보호원장, 철도청장, 공정거래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거쳐 1997년 김영삼 대통령 때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을 맡았다. 외환위기의 실상을 축소 보고한 혐의(직무유기)로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강경식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이사장과 함께 검찰에 기소됐다가 2004년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 중소기업연구원 등 연구소에 몸담았다. 2008년 4월부터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스스로 철저한 시장경제주의자라고 말할 정도로 시장원리를 존중한다. 공직을 떠난 지 18년 만인 지난 2월부터 한국무역협회장을 맡고 있다.
△1942년 경남 밀양 출생 △1960년 경기중·고 졸업 △1966년 서울대 법학과 졸업 △행정고시 4회 △1973년 미국 시러큐스대 행정학 석사 △경제기획원 차관보 △환경처 차관 △한국소비자보호원장 △철도청장 △공정거래위원회 초대 위원장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국가경영전략연구원장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
서욱진/김순신 기자 ventur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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